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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대첩 이후 가장 큰 대승” 북한군 80km 밀어낸 백골부대

dalmasian 2026. 6. 20. 19:50

[호준석의 역사전쟁] 2026.06.20.
1948년 말 서북청년단원 등 월남한 청년들을 주축으로 창설된 국군 18연대는 6·25전쟁 당시 국군, 미군, 북한군, 중공군을 통틀어 최강의 부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공산주의의 실상을 체험한 청년들이 반공 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는 부대였기 때문입니다. 장병들이 철모에 “죽어 백골이 돼도 고향 땅을 되찾겠다”며 백골 마크를 그려 ‘백골부대’로 불렸습니다. 산 위에서 굴러 떨어진 철모에 붙은 백골 마크만 봐도 적군은 두려움에 떨었다고 합니다. 6·25전쟁 초기 18연대는 수도사단 소속이었지만 흥남 철수 이후 3사단으로 배속됐습니다. 1962년 3사단 전체가 백골부대가 되고, 18연대는 ‘진(眞)백골부대’가 됐습니다. 18연대는 2020년 18보병여단(진백골여단)으로 승격했습니다.

6·25전쟁 당시 백골부대는 낙동강 전선의 안강·기계 전투, 원산 점령, 함흥 점령 등 무려 3회에 걸쳐 전 부대원이 특진하는 눈부신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1951년 백골부대가 적에게 설악산을 빼앗은 양양·오색·고성 진격전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이 전투가 없었다면 지금 설악산은 북한 땅일 것이고 우리에게 설악산은 금강산처럼 상상 속의 산일 것입니다. 더구나 이 전투는 국군이 대패의 치욕을 맛본 현리 전투 직후의 대역전극이어서 더욱 드라마틱합니다. 6·25전쟁 76주년을 앞둔 오늘은 양양·오색·고성 진격전의 현장으로 가보겠습니다.

1951년 5월, 만 1년에 가까워진 전쟁은 결정적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낙동강까지 밀렸던 국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월 28일 서울을 되찾고, 10월 1일 38선을 넘어 10월 26일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12월 15일 흥남 철수작전이 시작됐고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내줬습니다. 중공군은 2월, 4월 공세를 통해 거세게 밀어붙였지만 국군과 유엔군은 지평리 전투 항전 등으로 3월 15일 서울을 수복한 뒤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중공군은 4월 공세에 실패하자 5월 다시 중·동부 전선에서 일대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미군에 비해 ‘약한 고리’로 생각한 국군을 집중 공격해 전선을 뚫고 내려가려는 것이었습니다. 5월 17일부터 21일까지 중공군 9개 사단이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 일대에서 국군을 공격해 대승을 거둡니다. 이것이 현리 전투입니다. 국군 3사단과 9사단은 2만 2043명의 병력 중 62%인 1만 2840명이 희생되는 궤멸적 피해를 입고 평창군 하진부리까지 60여 km를 밀려 내려갔습니다. 지금 고속도로로 달려도 1시간 20분 거리입니다. ‘역사적 대패’라는 오명을 얻은 현리 전투로 미군은 국군을 ‘스스로 싸울 수 없는 군대’로 평가하고 일부 부여했던 육본의 작전통제권을 박탈했습니다. 3사단과 9사단이 소속된 국군 3군단은 해체됐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자칫하면 전쟁 전체의 승기를 내어줄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전열을 가다듬은 국군이 필사적 반격으로 중공군과 북한군 6만 병력을 와해시킨 것입니다. 현리 전투의 기세를 몰아 전쟁을 끝내려 했던 중공군의 ‘5월 공세’는 오히려 ‘5월의 학살’로 불리게 됐습니다. ‘5월의 학살’은 5월 공세에서 중공군의 손실이 너무 심했기 때문에 미국이 부른 명칭입니다. 5월 공세 실패로 중공과 북한은 전쟁 승리를 최종 포기했고, 6월 23일 말리크 유엔 주재 소련대사를 통해 휴전 회담을 제의합니다. 이후 정전협정 직전인 1953년 6월 금성천 전투 전까지 중공군은 대규모 공세를 한 번도 시도하지 못했습니다.

‘백골부대’ 18연대는 현리 전투에서 대패한 3사단에 소속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18연대는 후퇴할 때도 대열이 흐트러지지 않았고 병력 손실도 거의 없었습니다. 일주일이나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지만 연대가를 부르며 전장에서 철수했습니다. 방태산에서 중공군이 만들어 놓은 임시 포로 수용소를 발견하자 특공대를 조직해 아군 200여 명을 구출해서 함께 철수할 정도였습니다. (<진백골부대 전사>(2000))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현리 전투 패배로 3군단이 해체되자 18연대가 속한 3사단은 백선엽 소장의 1군단에 배속됐습니다. 다른 패전 부대들은 작전 참여조차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18연대는 5월 24일 새벽 5시경 정선군 임계면 송계리 일대에 집결해 병력과 장비를 보충받고 다시 전투 태세를 갖췄습니다.

중공군은 하진부리까지 밀고 내려와 있었습니다. 하진부리는 동쪽으로 강릉까지 40km에 불과합니다. 보급에 허덕이던 중공군은 강릉 점령이 절실했습니다. 강릉에는 비행장이 있어 미군의 포탄,탄약,보급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강릉을 잃으면 국군과 미 해군과의 합동작전도 불가능해집니다.(백선엽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중앙일보사)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1군단은 5월 25일까지 대관령에서 필사적으로 싸워 중공군을 격퇴합니다. 이어 5월 26일 새벽 6시부터는 대대적인 반격 작전이 시작됐습니다. 5월 28일 새벽 2시 1군단 예하 수도사단과 11사단은 매복산(양양군)과 가잔리, 인구리(양양군)를 잇는 목표 지역을 빼앗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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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1군단장은 11사단에게 서쪽에서 설악산 일대를 공격하게 하고, 수도사단은 동쪽에서 간성을 공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1군단이 대공세를 펼치게 되자 추가 부대가 필요해졌습니다. 마침내 예비대로 빠져있던 3사단의 정예부대인 18연대에 출동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양양을 지나 오색국민학교에 집결한 18연대는 5월 29일 새벽 6시 가라피리의 공격 개시선을 통과해 마산리 방향으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서쪽의 11사단이 원통과 미시령 일대(설악산 북쪽)를 공격하는 동안 적이 포위망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오색 일대에서 고착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오색 일대에는 인민군 13사단 2개 대대가 험준한 산악 지대와 협곡을 이용해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주공(主攻)을 맡은 백골부대 3대대는 양양에서 오색으로 향하는 도로의 우측 방향으로, 조공(助攻)을 맡은 2대대는 도로 좌측 능선을 따라 공격해 올라갔습니다. 인민군 후방인 오색약수터 부근 고지로는 수색중대가 침투했고 1대대는 예비대로 3대대를 따라 올라갔습니다. 비가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인민군은 능선 요지마다 진지를 첩첩이 구축해 저항했습니다. 백골부대는 전방에서 사격해 북한군이 진지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측면과 후방으로 부대를 투입해 진지를 하나하나 걷어내는 방식으로 전진했습니다. 한개 진지를 돌파할 때마다 전사자와 부상자가 속출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물러서지 않는 백골부대의 전통으로 쏟아지는 포화를 뚫으며 전진하던 18연대는 그러나 목표 지역을 눈앞에 둔 현재의 길갈교(강원도 양양군 서면 오색리) 일대 개활지에 이르러 멈춰서고 말았습니다. 이곳이 인민군이 화력을 집중시킨 최후 저지선이었던 것입니다. 사방에서 쏘아대는 총탄과 포탄에 사상자는 늘어만 갔습니다.(백골부대 참전 용사 문세훈, 김익수, 오병철, 이순재 증언)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이때 나타난 것이 백골부대 수색중대였습니다. 적 퇴로를 끊기 위해 오색약수터 북쪽으로 침투해 들어갔던 수색중대가 적 후방에서 인민군을 타격해 들어온 것입니다. 예비대로 따라가던 1대대도 길갈교 부근에서 북한군 옆쪽으로 치고 들어가 협공에 나섰습니다. 전세는 급변했습니다. 마침내 오후 2시경 2대대와 3대대가 목표 지역인 마산리 일대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때쯤 비가 그치고 날씨가 개었습니다. 백골부대의 진격이 워낙 빨라 많은 중공군과 인민군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채 일대에 갇혀 있었습니다. 항공지원에 나선 미군이 도주하는 적군을 대대적 폭격으로 격멸했습니다. 설악산으로 도주하는 적군은 조준 사격으로 소탕했습니다.

“공군에 지원 요청을 해서 폭격을 하니까 적군이 도망해서 산으로 올라오는데 ‘딱 콩’ 쏘니까 푹 쓰러지고 푹 쓰러지고, 그때 중공군 군단을 전멸시키고, 다시 내려와서 오색국민학교로 집결하여 트럭을 타고 이동했다.”(참전 용사 홍현달 증언)

1군단은 계속 북진해 29일 고성군 간성읍을 점령하고 6월 14일에는 고성군 일대를 모두 확보했습니다. 현리 전투 대패 전에 인제-속초를 이었던 전선이 오히려 18일 만에 향로봉(강원 고성)과 금강산 코앞까지 무려 69km나 치고 올라간 것입니다. 중부전선의 미군 10군단이 5월 말까지 화천저수지-양구까지밖에 진출하지 못하자,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이 전선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신 캔자스선’을 설정하고 국군의 진격 속도를 조절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오색에서 나와서 양양을 거쳐 고성까지 차를 타고 돌진했다. 군단에 가서 현리 전투에서 패전한 것이 아니라 18연대가 오색전투에서 승전했기 때문에 현재 전선이 있는 것이기에 승전이라고 말했다. 통일전망대가 있는 곳을 넘어 북측 고성 시내까지 시가지 전투를 하면서 점령해 들어갔다. 인민군이 있었지만 우리가 물고기를 잡고 있어도 대항을 하지 못했다. 우리가 가슴을 치며 억울한 것은 휴전 협상을 한다며 공격을 중단시키는 바람에 코앞의 금강산을 점령하지 못한 것이다.”(백골부대 참전 용사 홍현달 증언)

금강산을 바로 눈앞에 두고 멈춰서야 했던 이때의 동부전선은 2년 후 정전협정을 통해 현재의 휴전선으로 그대로 고착됐습니다. 6.25 전쟁 전의 38선보다 80km나 북쪽으로 더 올라간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휴전선은 가장 동쪽만 금강산 바로 아래까지 높이 솟아올라 있습니다. 양양,오색,고성 진격전의 승리가 없었다면 휴전선은 양양 일대로 그어지고, 속초, 고성, 인제, 양구, 설악산은 북한 땅이 됐을 것입니다.


비슷한 기간, 중부 전선에서도 역사적 대승이 펼쳐졌습니다. 4월 화천 사창리 전투에서 대패해 가평까지 30km나 밀려 내려온 국군 6사단(사단장 장도영 준장)은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절치부심했습니다. 철모에 ‘결사’를 새겨 넣고 5월 16일부터 29일까지 벌어진 용문산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습니다. 화천까지 적군을 추격해 파로호 전투로 이어지는 기간 동안 중공군 3개 사단이 궤멸되고 2만1550명이 사살됐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동부 전선에서는 백골부대를 위시한 국군 1군단이, 중부 전선에서는 6사단이 대승을 거두면서 북한군과 중공군은 4,5월 공세에서 무려 18만 3천명이 사상, 실종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수나라 군대 30만 명을 궤멸시킨 서기 612년 살수대첩 이후 가장 큰 전승입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제60군 180사단은 굶주림과 피로로 움직이지 못하거나 산나물과 풀뿌리를 먹고 식중독에 걸리거나, 작전 중 전사하거나 뿔뿔이 흩어진 사람이 7천명에 달했다.. 죽음과 부상, 굶주림, 그리고 전세의 불리한 그림자에 휩싸인 장병들은 끊임없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북쪽을 향해 걷고 있었다.”(왕수쩡 <한국전쟁에 대해 중국이 말하지 않았던 것들>(2013))

현리 전투와 사창리 전투 대패로 유엔군사령부로부터 ‘스스로 전투할 수 없는 군대’로 평가됐던 국군은 자력으로 기록적인 설욕전에 성공하면서 명예를 회복했습니다. 1951년 5월 31일 소련은 미국과 휴전을 위한 막후접촉을 시작했고 6월 23일 휴전회담을 정식 제의했습니다. 이때부터 전선은 사실상 움직이지 않았고, ‘이기지도 말고 지지도 말라’는 정치적 전투가 정전협정 조인 때까지 2년간 계속됐습니다.

호준석 국민의힘 전 대변인, 현 서울 구로갑 당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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