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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5성 장군, 더글리스 맥아더

dalmasian 2026. 2. 1. 16:20

1945년, 미국의 오성장더글러스 맥아더가 일본에 도착한 이후 그의 생활은 방종 그 자체였다. 그는 수년간 ‘일본 제일의 여신’이라 불리던 여성을 곁에 두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일본의 ‘상왕(太上皇)’으로 군림했다. 그 후 7년 동안 그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었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가 일본을 떠날 때 수백만 명의 일본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와 그를 배웅했다는 사실이다.

1951년 4월 16일, 도쿄의 거리에는 인파가 바다처럼 몰려들었다. 수백만 명의 일본인들이 자발적으로 거리로 쏟아져 나와 미국 대사관에서 하네다 공항까지 이어진 도로를 완전히 메워버렸다. 그들은 시위를 하는 것도, 항의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한 명의 미국인이 일본을 떠나는 길을 배웅하고 있었다. 군중 속에서는 울음과 외침이 끊이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감사합니다, 장군님”, “맥아더 장군, 부디 떠나지 마세요”라는 팻말을 높이 들고 있었다.

정복자이자 해방자라는 상반된 얼굴을 동시에 지닌 이 복잡한 인물, 바로 더글러스 맥아더였다. 미국의 오성장군이었던 그는 왜 패전국 국민들로 하여금 이토록 진실하면서도 복잡한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을까? 그 모든 이야기는 그가 처음 일본 땅을 밟았던 순간부터 시작된다.

1945년 8월 30일, 맥아더의 전용기 ‘바탄호’가 아쓰기 공항에 착륙했다. 그는 클래식한 옥수수대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문 채 비행기에서 내려왔고, 무기는 전혀 소지하지 않았으며, 수행 인원도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수만 명의 무장한 옛 일본군 병사들이 복잡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맥아더는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이 태연함 자체가 하나의 무언의 권력 선언이었고, 이후 7년에 걸친 그의 ‘일본 상왕’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장면이었다.

도쿄에 도착한 뒤 맥아더의 최우선 과제는 단순한 군사 점령이 아니었다. 그는 일본이라는 국가를 정신적으로 완전히 재구성하려 했다. 그가 겨눈 대상은 일본인들의 마음속에서 가장 신성한 존재, 바로 히로히토 천황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이토 히로부미가 프로이센 체제를 본떠 천황의 절대 권위를 확립한 뒤, 천황은 ‘현인신(現人神)’, 즉 인간의 모습을 한 신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맥아더는 이 신을 직접 신단에서 끌어내릴 작정이었다. 1945년 9월 27일, 그는 황거를 찾아가지 않았다. 대신 히로히토를 ‘호출’했다.

미국 대사관 관저에서 역사적인 장면이 사진으로 남았다. 키 180cm가 넘는 맥아더는 목이 열린 군복 차림으로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반면 왜소한 체격의 히로히토는 몸에 맞지 않는 연미복을 입은 채 긴장한 모습으로 옆에 서 있었다. 이 사진은 다음 날 일본 전역 신문의 1면을 장식했고, 일본 국민에게 준 심리적 충격은 원자폭탄에 비견될 정도였다. 신도 결국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정신적 상징이 무너졌다면, 정치적 권위 역시 짓밟혀야 했다. 당시 일본 총리였던 요시다 시게루가 맥아더를 예방하러 왔을 때, 경비병은 그에게 후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통보했다. 이는 주권 국가 수반에게는 극도의 굴욕이었다.

요시다가 분노를 담아 항의하자, 맥아더는 창밖 도쿄만을 유유히 항해하는 미 제7함대의 거대한 함영을 가리키며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 상황에 맞게 표현을 다시 정리하시죠.” 요시다는 즉시 침묵했다. 그는 구시대의 모든 규칙이 이미 무효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폐허가 된 옛 질서 위에서 맥아더는 또 다른 얼굴, ‘해방자’로 변신했다. 그는 대대적인 사회 개혁을 추진했으며, 그중에서도 토지 개혁은 핵심이었다.

그는 지주가 소유할 수 있는 토지의 상한선을 1정보(약 9,917㎡)로 제한하고, 초과분은 정부가 헐값에 강제 매입해 무토지 소작농에게 재분배하도록 했다. 단 2년 만에 일본 소작농의 약 90%가 자기 땅을 갖게 되었고, 농업 생산력은 빠르게 회복되었다. 굶주림의 경계에서 허덕이던 하층민들에게 맥아더는 생존의 길을 열어준 ‘구세주’였다.

그는 일본 여성들에게도 전례 없는 권리를 부여했다. 참정권과 재산 상속권을 인정함으로써 수천 년간 이어져 온 남존여비의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흔들었다.

그가 주도해 제정된 신헌법은 특히 ‘제9조’로 유명하다. 해당 조항은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한 국제 평화를 진심으로 추구하며, 국가 권력에 의한 전쟁과 무력의 위협 또는 무력 행사를 국제 분쟁 해결 수단으로 영구히 포기한다.”

이 조항은 일본의 목에 씌워진 족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전후 일본이 군비 경쟁을 피하고 모든 자원을 경제 발전에 투입할 수 있게 만든 토대이기도 했다. 이는 훗날 일본의 재도약을 가능하게 한 기반이 되었다.

물론 이 ‘상왕’의 생활은 극도로 사치스러웠다. 그는 재벌 가문의 호화 관저에 거주하며 미국식으로 개조했고, 침구류까지 모두 미국에서 공수했다. 평범한 일본 시민들이 보리와 밀기울이 섞인 주먹밥을 얻기 위해 줄을 서던 시절, 그의 식탁에는 매일 미국 본토에서 공수된 신선한 스테이크와 채소, 향긋한 커피가 올랐다.

그와 ‘쇼와 시대 제일의 여신’이라 불리던 배우 하라 세츠코의 염문설도 끊임없이 떠돌았다. 그녀는 자주 맥아더의 관저를 드나들며 각종 공식 행사에 동행했다. 어떤 이는 이것이 구귀족들이 정복자에게 바친 ‘선물’이라고 했고, 또 어떤 이는 국가를 위한 희생이라고 말했다. 진실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소문들이 맥아더의 어떤 전략적 결정을 흔들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그가 천황을 유지한 것은 사회 안정을 위해 그 권위를 이용하고 공산주의 사상의 확산을 막기 위함이었고, 일부 전범을 사면한 것은 친미 정권을 구축하기 위해서였으며, 재벌을 해체한 것은 군국주의의 경제적 기반이 부활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가 한 모든 일은 철저하게 미국의 국가 이익을 위해 계산된 선택이었다.

결국 일본을 사실상 통치하던 이 절대 권력자도 한국전쟁을 둘러싸고 미국 대통령 트루먼과 의견이 충돌하면서 몰락했다. 그는 전쟁을 중국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결과 한 통의 전보로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이 소식이 일본에 전해지자, 국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바로 그 장면, 수백만 명이 눈물을 흘리며 그를 배웅하던 장면이 펼쳐졌다.

그 복잡한 눈물 속에는 평화와 토지, 빵을 가져다준 데 대한 감사가 있었고, 국가 주권을 상실한 굴욕이 있었으며,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혼란도 함께 담겨 있었다.

맥아더는 7년이라는 시간 동안 일본에 외과 수술과도 같은 대개조를 단행했다. 그는 떠났지만, 일본은 이미 그에 의해 영원히 바뀌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