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 Column

당신이 한 말 맞습니까

dalmasian 2026. 3. 5. 11:58

[기자의 눈] 2026.03.05.


인사 문자를 받으면 요즘은 열기 전에 안다. 어떤 문장이 올지. 어차피 뻔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답장하기가 꺼려지는 건 무례해서가 아니다. 나한테 온 말이지만 나한테만 온 말이 아니라서다.

가끔 다른 문자가 온다. 지난 일을 기억해 고맙다 말하고 별것 아닌 걱정과 격려를 건네는 한 줄. 답장을 안 할 수가 없다. 말의 무게가 다르다. 행사 인사말도 다르지 않다.

얼마 전 정부출연기관(출연연) 관계자들과 AI 활용 이야기를 나누다 '설마' 했던 사실을 들었다. 한 관계자는 "다들 행사 포스터를 AI에 입력해 인사말을 작성하다 보니 기관장들끼리 인사말이 겹치는 사례가 생긴다"며 "사전에 서로 조율한다"고 말했다.

포스터에는 행사명과 프로그램 설명까지 나오니 행사 성격에 맞춰 AI가 그럴듯한 말을 쏟아낼 것이다. 같은 입력값을 넣었으니 결과물이 비슷한 건 당연지사다.

행사에 왜 그렇게 많은 인사를 초대해 인사말을 시키는 걸까. 인사말에는 원래 두 가지 기능이 있다. 실질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것과 이 자리에 함께 있다는 감정을 나누는 것이다.

행사에 기관장을 세우는 건 후자를 기대해서일 것이다. 이 행사를 어떻게 읽는지 우리 기관의 연구와 어떻게 연결 짓는지 청중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은지 등이다. 사실 매번 다른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해내는 게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가끔은 인사말이 행사보다 더 오래 기억된다. 4년 전 필즈상 수상으로 유명한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의 서울대 졸업식 축사가 그랬다.

허 교수는 "제 대학 생활은 잘 포장해서 이야기해도 길 잃음의 연속이었다"며 자신의 방황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는 식의 말에 대해 "좋은 조언이고 사회 입장에선 유용한 말이지만 개인의 입장은 다를 수 있다"며 경계하라고 당부했다.

화려한 수상 경력도 세계적 연구 성과도 아니었다. 청중이 듣고 싶었을 말을 자기 이야기로 꺼낸 것이었다. 허 교수만의 언어로 읽어낸 말은 처음 만난 청중에게 잔잔한 감동을 줬다.

AI를 도구로 활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바쁜 일정에 많은 행사 인사말을 매번 직접 쓰기 어렵다는 현실도 이해한다. 아쉬운 건 거기서 멈춘다는 점이다.

LLM은 확률적으로 가장 높은 표현을 고를 뿐 이 행사를 내 기관의 연구와 어떻게 연결 짓는지 이 자리의 청중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은지는 결국 사람만이 답할 수 있다.

청중을 감동시킨 것도 답장하게 만든 것도 결국 나를 향한 말 한 줄이었다. AI가 초안을 써도 괜찮다. 단 거기에 자기 목소리 한 줄을 얹는 것. 그것이 인사말을 인사말답게 만드는 게 아닐까.
조가현 기자 gahy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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