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09.
[아무튼, 주말]
정치적 전리품 전락
남발하는 이전 공약

4월 28일 서울 성북구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총학생회가 여당 광주 지방선거 후보자 등이 발의한 한예종 광주 이전 법안을 규탄하고 있다. /뉴시스
“장기 청사진 없이 정치적 목적으로 밀어붙이는 이전(移轉)은 실패할 것이며, 껍데기 이전에 그칠 것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총학생회가 더불어민주당이 발의한 전남광주통합특별시로의 이전 법안을 규탄하며 낸 성명이다. 한예종은 피아니스트 임윤찬, 발레리나 박세은, 배우 김고은·박정민 등 톱스타의 산실이자 K콘텐츠 열풍의 전진기지. 이를 서울의 예술 생태계에서 뜯어내 ‘지방 균형 발전’의 제단에 바친다는 발상에 이 학교는 폭탄을 맞은 분위기다.
젊은 예술인의 반발에 한예종 이전 논란이 유독 부각됐지만, 이런 곡소리가 지금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정부가 서울에 있는 500여개 공공 기관을 전수조사하며 2차 공공기관 이전 속도전을 벌이고, 6월 지방선거에 나선 여야 후보들이 공공 부문은 물론 민간 기업까지 ‘우리 동네로 떼오겠다’는 공약을 남발하면서다. 표에 도움된다 싶으면 조직의 특수성도 국가 경쟁력도 고민하지 않고 막 던지는 이전 공약 요지경을 들여다봤다.

일러스트=한상엽
한국은행? 헌법재판소? “일단 던져”
현재 전남광주통합특별시가 정부에 이전을 요구하는 공공기관은 농·수협중앙회와 한국지역난방공사 등 40여개다. 특히 공을 들이는 것은 문화 관련 기관이다. 이미 서울 예술의전당 내 국립 서울예술단을 ‘아시아예술단’으로 개명해 광주로 옮기기로 했다.
민주당 전남광주통합특별시장 후보인 민형배 의원은 13년 전 세종시로 이전한 문화체육관광부마저 광주로 옮겨 “명실상부한 문화 수도”를 완성하겠다고 한다. 그중 ‘일개 문체부 산하’인 한예종이 이렇게 큰 논란이 될지 예상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책 은행 지방 이전을 두고 각 지역이 '금융 수도'를 표방하며 뛰어들고 있다. 지난 2022년 서울 여의도에서 산업은행 직원들이 당시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이었던 부산 이전을 규탄하는 집회를 연 모습. 금융의 집적 기능 등을 근거로 한 이런 반대는 지역 정치인들로부터 '수도권 이기주의'로 치부되곤 한다. /뉴스1
국책은행 등 공공 금융 기관도 지자체 간 유치 경쟁 속에 쪼개질 판이다. ‘금융 수도’를 표방한 부산은 한국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등 대부분의 국책 은행과 한국투자공사 등 7개 정책 금융기관 유치를 내걸었다. 대구와 대전, 세종시도 IBK 기업은행 본점 등을 가져오겠다고 한다.
그러자 전북과 강원 등은 중앙은행인 한국은행 유치로 목표를 더 크게 잡았다. 한국은행 소재지를 ‘서울’로 규정한 조항을 ‘대한민국’으로 바꾼 법도 발의됐다. “자산 운용의 집적 기능을 높여야 한다”며 한은과 9대 공제회(군인·교직원)를 동반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도 단골로 붙어 다닌다.
금융 기관들은 사색이다. 고객과 자금, 국내외 정보·인력 등 인프라가 집중된 수도권의 금융 생태계에서 떨어져나오면 정책 금융 기능이 약화하고 주주 가치를 훼손한다는 것이다. 한 국책 은행 관계자는 “국민연금공단 ‘전주 사태(혁신도시 이주 과정에서 고급 인력과 자본이 대거 이탈)’가 재현될 것”이라고 했다.
민간 은행과 증시를 감독하는 금융감독원에 대해서도 세종 혹은 부산 이전설이 나오자 이찬진 원장은 “감독 기관이 현장을 떠난다는 건 우스운 일”이라고 했다.

행정 수도 건설은 각종 중앙 기관의 지역 나눠주기의 논리로 폭발했다. 대구는 '대구 홀대론'에 '독립혁명의 성지' 등의 명분을 내세워 대법원 이전을 추진한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전경. /뉴스1
최고 사법 기관인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도 전국을 말판으로 한 이전 게임의 졸(卒)이 됐다.
수년 전 세종시가 “행정수도 완성을 위해 청와대와 국회, 대법원도 옮겨야 한다”며 쏘아 올린 대법원 이전설은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탄생지로 옮기자”(전북) “사법부는 권력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 대법원은 대구가, 헌재는 광주가 갖자”(대구)는 식으로 진화했다. 현 정부 들어 검찰 무력화와 4심제 도입 등 사법 기관에 대한 여권의 압박이 커지면서 지방 이전론은 탄력을 받는 분위기다.
“재미 좀 봤던” 수도 이전 공약
이재명 대통령은 2022년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보선에 출마하며 ‘김포공항 이전’을 내놔 큰 논란을 일으켰다. 이처럼 이전 공약은 한국 각종 선거의 최대 문법이 됐다.
세계에 드문 현상이다. 임기 몇 년에 불과한 선출직이 각국 수도 탄생과 함께 자리 잡은 중앙 정부 기관과 대법원, 뉴욕·런던·홍콩 등에 수백년 뿌리 내린 금융계와 예술 기관, 실리콘밸리의 IT 기업을 강제 이주시킨다는 발상을 하지 못한다.

2002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당시 여당 후보인 노무현 후보가 지방 균형 발전의 꿈을 이루겠다며 수도 이전 공약을 설명하고 있다. 충청도 출신 이회창 후보와 맞붙은 당시 센세이셔널한 승부수로, 충청 표심을 크게 흔들었다. /조선일보DB
거슬러 올라가면 2002년 대선이 채 3개월도 남지 않은 시점 노무현 후보가 낸 ‘행정 수도 충청 이전’ 공약이 있다. 당시로선 기상천외한 승부수로, 단번에 선거 이슈를 빨아들이며 판세를 뒤집었다. 수도 이전은 위헌 결정이 났지만 세종행정중심복합도시와 몇몇 혁신도시 건설로 현실화됐고 노 대통령은 “(정치적)재미 좀 봤다”고 했다.
이는 돌이킬 수 없는 판도라의 상자가 됐다. 2000년대까지 “세종시를 뒤집느냐 마느냐”로 들끓던 이슈는 충청 표심을 다독이기 위해 “세종시에 뭘 더 옮길까”로 옮겨갔다. 그러자 다른 모든 지역에서 “왜 우린 안 주느냐”며 ‘지역 홀대론’을 자극하는 각종 이전론으로 폭발했다.

국민연금이 전북 혁신도시로 가면서 터진 일명 '전주 사태'는 고급 인력이 대거 이탈한 일로 공공 부문에서 괴담처럼 남아있다. 국민연금은 결국 서울 사무소를 다시 개설했다. 전북 혁신도시 내 위치한 국민연금공단과 기금운용본부 전경. /뉴스1
단순 이식에 근거한 지방 균형 발전 정책은 정반대 효과를 낳고 있다. 한국은행 연구 결과 수도권의 국내총생산(GDP) 기여도는 2001~2014년 51.6%에서 2015~2022년 70.1%로 높아졌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생산성 격차가 되레 커졌다는 뜻이다.
수도권의 인구 분산 효과는 미미한 반면, 세종시나 일부 혁신 도시로의 주변 지역 인구 유입이 늘어 지방 소멸은 가속화됐다. 공공 부문 비효율 등에 따른 저성장이 장기화하며 정주 환경이 좋은 수도권에 수요가 집중된 탓이다.
공공 기관 임직원도 지역에 단신 부임할 뿐 가족은 서울에 남겨두고, 금요일부터 일거리를 만들어 상경하고 소득도 서울에서 쓴다. 각 기관이 ‘서울 사무소’를 다시 두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지난 10여년간 자산관리공사·한국거래소 등 서울의 여러 금융 기관을 부산으로 옮긴 결과, 양대 도시의 금융 경쟁력이 동반 하락했다는 분석도 있다. 영국 컨설팅그룹 지옌의 국제금융센터지수(GFCI) 평가에서 2015년 대비 2023년 서울은 세계 7위에서 10위로, 부산은 24위에서 31위로 내려앉았다.
그러나 지역 정치인들은 “더 확실히 이전하지 못한 탓”이라며 추가 공공 기관 이전만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다. 공적 자금이 투입된 해운사 HMM이 부산으로 가자, 성격이 전혀 다른 민간 기업을 마음대로 옮기겠다는 공약까지 나온다.
경기도 용인에 반도체 단지를 조성하고 있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를 두고 정부와 호남 정가에서 “재생에너지가 많은 새만금으로 이전하라” “반도체 호남 이전이 윤석열 내란 종식”이란 말이 나오자 업계는 황당하다는 표정이다.
수도권 편중 심화, 국가 성장 둔화
6·3 지방선거는 이전을 둘러싸고 지역끼리 서로 물고 물리는 전쟁터가 됐다. 같은 정당 안에서도 영·호남 지자체장 후보들은 “수도권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뺏어오겠다”고, 서울과 경기도·인천 후보들은 “역차별당해 뺏기지 않겠다”고 한다.

비수도권 지역들이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과 세종시에서 공공 기관 가져오기 쟁탈전을 벌이자, 수도권은 "역차별 정책으로 국가 전체의 경쟁력까지 해칠 수 있다"며 사색이다. 지난달 인천시청에서 열린 인천국제공항 통합 반대와 공공기관 이전 저지 인천 사수 범시민운동본부 출범식. /범시민운동본부 제공
한국마사회 이전의 경우 제주·경북·전북과 경기도의 타 도시들이 달려들고, 과천시는 연 500억원의 세수를 지키겠다며 결사 항전 태세다.
세종시는 “청와대와 국회가 안 와서 세종시 발전이 정체됐다”고 하면서,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에 자극받은 다른 지역의 문체부나 농림부 이전 요구엔 “무분별한 이전 요구는 국가 자산을 정치적 전리품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정치학자인 김형준 배재대 석좌교수는 “지방 자치의 생명은 자율성인데, ‘서울 것을 뺏어오자’는 저속한 논리에 빠져 자치 정신은 퇴보하고 국가 경쟁력만 갉아먹고 있다”고 말했다.
주민 사이에서도 우려가 나온다. 최근 광주 지역 시민단체 회의에서는 “기관 몇 개 옮겨와도 일자리가 많아지거나 삶의 질이 높아지지 않더라” “국비로 기반 시설 늘려봐야 시민 빚만 늘어나는 것” “무리한 한예종 이전으로 광주 이미지만 나빠진다”는 성토가 쏟아진 것으로 전해졌다.

세종시 건설 이후 청와대와 국회 이전이 지지부진해 충청 표심이 들썩이자, 여야를 막론하고 '세종시 완성'을 공약하고 있다. 세종시 세종동 국회세종의사당 건립 예정 부지 모습. /연합뉴스
한순구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무분별한 이전 공약의 본질은 질투심에 따른 하향 평준화”라며 “기반 시설과 서비스를 분산하는 건 인구가 늘어날 때는 의미 있지만, 지금처럼 인구가 줄고 고령화될 때는 이야기가 다르다. 지방 살리기도, 수도권 과밀 해소도 기대할 수 없는 국력 낭비일 뿐”이라고 말했다.
조홍종 단국대 교수도 “양질의 일자리가 이전하면 지역 경제가 활성화된다는 국토 균형 발전론은 실패로 판명됐다”며 “기계적 평등과 지역 이해에 얽매여 공공 기관을 흩뿌리지 말고 서울 같은 메가시티를 한두 개만 만들어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정시행 기자 polyg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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