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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시작하자마자 韓 대통령 백악관 초청… 위기에도 유머 로널드 레이건

dalmasian 2026. 6. 5. 11:21

2026.06.05.
[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2004년 6월 5일 93세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1981년.

미국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1911~2004)은 대통령 당선 이전에는 ‘리건’으로 표기했다. 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리건’으로 검색하면 대통령 당선 8년 전인 1971년 10월 한국을 방문한 사실이 확인된다.

“로널드 리건 미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닉슨 미 대통령의 특사로 오는 10월 8일부터 2주일간 한국을 비롯한 극동 6개국을 순방할 것이라고 백악관이 9일 발표했다.”(1971년 9월 11일 자 1면)

레이건은 10월 15일 밤 한국에 도착해 이튿날 오전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닉슨 대통령 친서를 전하고 양국 현안에 대해 회담했다. 이때는 누구도 이 배우 출신 정치인이 훗날 대통령에 당선되리라고 예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1980년 7월 18일자 2면.

1968년 대선 후보에 도전했던 레이건은 1976년 다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를 결정하는 예비 선거에 나섰다. 현직 대통령 포드에 간발의 차이로 고배를 마셨다. 다시 4년 후인 1980년 7월 마침내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결정됐다. 여론조사에서 현직 대통령인 민주당 후보 카터를 앞서고 있었다. ‘은막에서 백악관 문턱까지-리건 스토리’ 기사가 실렸다.

“지사 리건이 12년 전 공화당 대통령 후보에 첫 도전했을 때, 반대자들은 그가 대통령직을 수행할 지성과 세련됨과 경험이 없는 한낱 영화배우에 지나지 않는다며 백안시했다. 그 소리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지지자들은 ‘미국에서 두 번째로 어려운 자리’인 캘리포니아주(州) 지사를 8년이나 해낸 그의 업적을 들어 반박한다. 리건이 오늘의 정치적 위치를 확보한 원인을 그의 원만한 대인관계와 설득력에서 찾는 이가 많다. 누구든지 자기 편을 만드는 것이 장기인 그는 이번 선거 운동 중 인기 투표에서 언제나 1위를 차지했다. 근 30년의 배우 생활이 그로 하여금 대중의 심리를 잡는 재능을 키워주었는지도 모른다.”(1980년 7월 18일 자 2면)

1980년 11월 6일자 1면.

레이건은 대선에서 카터를 이기고 제40대 대통령에 당선했다. 선거인단 수 489 대 49의 압승이었다. 임기 시작하는 1981년 1월 20일 69세 349일로 역대 최고령 대통령이었다. 이 기록은 훗날 제46대 조 바이든 대통령이 78세 61일, 제47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78세 219일로 취임해 잇달아 깨진다.

레이건은 임기 시작하자마자 한국 대통령을 워싱턴으로 초청했다. 일본보다 먼저 한국 정상을 초청한 일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당시 한국 대통령은 전두환이었다. 레이건은 2월 2일 오전 백악관에서 전두환과 회담했다. 전직 카터와 달리 주한 미군을 철수하지 않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1981년 2월 3일자 1면.

“백악관의 미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레이건 대통령은 전 대통령에게 ▲주한 미 지상군에 대한 아무런 철수 계획도 없다. ▲한·미 상호 방위 조약에 구체화된 대한(對韓) 방위 임무를 준수한다. ▲한·미 안보협의회 등 그동안 중단됐던 양국 정부 간 모든 협의를 즉각 재개한다. ▲한국의 미곡 특별 수입 요구에 긍정적으로 응하며, ▲한국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긴급 사태가 발생할 경우 에너지 공급을 확보하려는 한국을 지원토록 하겠다고 보장했다.”(1981년 2월 3일 자 1면)

전두환은 백악관 회담이 끝난 후 ‘평화적 정권 이양’ 의사를 밝혔다. 미 내셔널프레스클럽 연설에서 “한국 국민들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란 무엇보다도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의미한다”면서 “본인은 이러한 헌정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1981년 3월 31일자 호외.

한·미 정상회담 약 두 달 후인 3월 30일(현지 시각) 레이건은 22세 백인 청년이 쏜 총탄에 가슴을 맞는 위기를 겪었다. 취임 70일 만이었다.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은 31일 오전 4시 30분(한국시간) 워싱턴 힐튼 호텔을 나서는 순간 한 괴한이 쏜 총에 부상을 입었다. 레이건 대통령의 용태는 중태이나 안정되어 있는 상태이며 의식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라인 노프지거 대통령 보좌관은 대통령이 왼쪽 가슴에 상처를 입고 현재 조지 워싱턴 대학병원에 입원 중이며 심장을 다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1981년 3월 31일 자 호외)

1981년 4월 1일자 1면.

1981년 4월 1일자 3면.

레이건은 피격 후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수술 직전 집도하는 의사들에게 농담을 던졌다.

“레이건 대통령은 수술실에서 의사들을 보자 “공화당원들이오?”라고 또다시 여유 있는 농담을 던졌다. 의사들은 “오늘은 모두 다 공화당원들입니다”라고 대답을 한 뒤 수술에 들어갔다. 의사들은 레이건 대통령이 고령인 점을 감안, 처음에는 이날의 수술에서 탄환을 제거하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결국 15.2㎝ 정도 가슴을 절개하고 탄환을 제거했다.”(1981년 4월 1일 자 3면)

조선일보 워싱턴 특파원은 취임 200일을 맞은 레이건에 대해 “부드러움 뒤에 예리함과 강인함이 있는 무서운 대통령”으로 평가했다.

1981년 9월 1일자 9면.

“레이건 대통령은 참으로 대범하고 여유가 있다. 유머가 풍부하고 웅변술이 탁월하다. 활짝 웃기보다 수줍은 듯한 미소를 띠며 쉬운 말로 연설하나 그의 말은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제스처가 자연스럽고 옷차림이 멋장이다. 인자한 아버지나 할아버지 같은 인상을 풍긴다. “대(大)회사의 회장과 같은 스타일로 행정부를 운영하겠다”던 그의 말은 실제와 부합한다. 그러나 그는 ‘무서운 회장’이다. 참모들 말을 경청하나 성깔이 있고 끈질김이 있고 배짱이 있다. 백악관 참모들과 불화설이 계속 나도는 헤이그 국무장관을 대외적으로는 두둔하고 대내적으로는 호통을 쳐 굴복시켰다는 이야기도 결코 헛소문이 아니다. (…) 레이건 대통령은 우방의 인권 문제를 크게 개의하기보다 우방을 미국 편에 서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1981년 9월 1일 자 9면)

심각한 상황에도 유머를 잃지 않는 점은 위기를 돌파하는 힘이었다. 1984년 재선에 나섰을 때도 유머로 위기를 극복했다. 언론과 여론조사에서 74세로 고령인 레이건의 나이를 우려할 때였다. 상대 후보 먼데일은 56세였다.

“TV 토론에서 사회자가 나이에 대해 질문했다. 레이건은 한마디 말로 상황을 제압했다. “나는 상대 후보의 젊음과 미숙함을 굳이 들춰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하지 않을 겁니다.” 토론회장은 웃음바다가 됐고, 나이 문제는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다.”(2018년 1월 12일 자 C16면)

2004년 6월 7일자 A18면.

레이건은 임기 중 냉전을 끝내고 소련 붕괴의 터전을 만들었다. 부음 기사는 이를 중요한 업적으로 서술했다.

“로널드 레이건 전(前) 대통령은 미국인들에게 자신감을 되찾아주고, 미·소 간 냉전(冷戰) 종식을 가속화한 인물로 평가된다. 퇴임시 지지율 63%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66%)와 더불어 역대 대통령 중 최고였다. 1981년 집권한 레이건은 높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 444일을 끈 이란의 미국인 인질 사태 등으로 무력감에 빠진 미국인에게 보다 단순했던 시절의 전통적 가치로 되돌아가 “미국에 다시 아침을 가져오겠다” 고 약속했다. 레이건은 원칙주의자이면서 실용주의자였다. 1983년 3월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부를 만큼 증오했지만, 재임 8년간 고르바초프와 5차례 정상회담을 가지며 신뢰를 쌓아 결국 퇴임 3년째 발생한 소련 연방 해체의 기초를 닦았다.”(2004년 6월 7일자 A18면)

이한수 기자 hs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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