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환의 ‘데킬라 샷’]
2026.06.13.

11일 (현지시간) 멕시코 과달라하라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한국과 체코의 경기에서 오현규(왼쪽)가 역전골을 넣고 환호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극적인 순간(2002년 이탈리아전 역전 골든골)의 주인공 안정환이 북중미 월드컵에서도 중앙일보에 관전평을 싣는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부터 본지와 인연을 맺은 안정환의 시선은 국내 축구 분석 중 가장 날카롭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리오넬 메시의 아르헨티나 우승 예측이 그 예 중 하나다. 이번 관전평의 제목은 〈안정환의 ‘데킬라 샷’〉. 그는 한국의 32강 진출을 사실상 확정한 12일(한국시간) 체코전 2-1 역전승의 기분이 딱 데킬라라고 했다. 왜 하필 데킬라일까.

안정환 해설위원.

11일 오후(현지시간) 멕시코 과달라하라 스타디움에서 열린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 체코전에서 황인범이 동점골을 성공시키고 있다. 강정현 기자
죽다 살았다. 후반 14분 선제 실점은 알고도 당했다. 블라디미르 초우팔의 롱스로인은 유럽 예선 때보다 더 날카로웠고, 라디슬라프 크레이치의 러닝 헤딩슛은 더 묵직했다. 평균 신장 1m88㎝에 육박하는 체코는 체코슬로바키아 시절부터 헤딩 득점으로 명성이 높은 팀이다.
후반 22분 터진 동점골은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스물세 차례 팀 패스 끝에 이강인이 절묘하게 스핀을 먹여 속도를 죽인 전진 패스를 찔렀다. 황인범은 공을 접는 동작으로 수비수를 따돌린 뒤 골키퍼 머리 위로 포물선을 그리는 칩슛을 띄웠다. 쑥스럽지만 2002년 내가 스코틀랜드 평가전에서 터뜨린 로빙슛만큼 아름다운 궤적이었다. 느리게 날아가는 공을 보는 동안 잠시 시간이 멈춘 듯했다. 축구에서 이 보다 더 아름다운 장면을 본 적이 있는가.
후반 35분에는 황인범이 오른쪽 측면을 파고들어 원터치 크로스로 오현규의 결승골까지 도왔다. 1골 1도움. 그러니까 이 경기의 주인공은 당연히 황인범이다. 지난 3월 발목을 다쳐 가까스로 대표팀에 합류한 걸 감안하면 더 드라마틱하다. 푹 쉰 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모양이다. 해외 팬들은 황인범을 두고 “파리생제르맹 미드필더 비티냐의 복제인간 같다”고 한다. 내가 보기엔 황인범은 제 손으로 따른 데킬라를 제가 들이켠 기분이었을 거다.

11일 오후(현지시간) 멕시코 과달라하라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한국과 체코의 경기에서 오현규가 역전골을 넣고 환호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결승골을 작렬한 오현규의 논스톱 왼발 슈팅은 목을 타고 넘어가는 데킬라 원샷처럼 뜨거웠다. 경기 후 오현규는 38도 고열을 참고 뛰었다고 고백했더라. 몸이 안 좋을 땐 오히려 결정적인 찬스를 더 잘 살리기도 한다.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알면 경기에만 초집중하게 된다. 이제야 고백하건대 나도 2002년 월드컵 조별리그 때 발목을 다쳤지만, 최주영 닥터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한 채 통증을 참고 뛰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전에서 골을 넣었다. 냉정하게 말해 이날 오현규의 플레이는 결승골 말고는 좋은 게 없었다. 그래도 결정을 지었다. 그러면 끝인 거다. 그게 스트라이커다.
오현규는 어릴 적 넉넉하지 않은 형편 탓에 축구 회비를 내지 않아도 되는 학교로 진학했다더라. 나도 고등학생 때 공사장 잡부로 일하며 땅 밑 수십m까지 내려간 적이 있다. 지하철 5호선 목동 구간 타시는 분들, 그거 만드는 데 내가 일조했다. 오현규 부모님은 운영하시는 추어탕집에 장기 휴무 안내문을 붙이고 직관을 오셨고, 오현규는 "한 달 뒤에는 부모님이 가게 문을 열지 않으셔도 되게끔 하겠다”고 했다. 그 약속, 지킬 거다. 내가 선수 시절 몸담았던 이탈리아 무대에서 한 명문팀이 오현규를 주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축구에서 가장 큰 무기는 간절함이다. 팬들은 인생을 걸고 뛰는 선수를 좋아한다. 골키퍼 김승규는 수퍼세이브를 두 차례 했다. (이)운재 형처럼 대한민국을 지켰다. 2024년 한 해에만 십자인대를 두 번 다치고도 다시 일어선 게 김승규다.

11일 오후(현지시간) 멕시코 과달라하라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한국과 체코의 경기에서 홍명보가 작전지시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홍명보 감독의 전술도 잘 먹혔다. 교체 카드로 조규성의 높이를 활용하기보다 오현규의 저돌적인 뒷공간 침투로 승부를 걸었다. 후반 24분 손흥민을 빼고 오현규를 넣은 결단이 그것이다. 손흥민은 전반부터 팀에서 가장 많은 슈팅을 때렸고, 쉼 없이 뛰어줬다. 황인범의 동점골 장면에서 상대 수비를 유인한 것도 손흥민이다.
미드필드 싸움에서도 이겼다. 양쪽 윙백 이태석과 설영우를 끌어올려 안으로 좁히자, 체코 선수들은 황인범을 잡으러 나가야 할지 처져 있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혼란을 일으키고 공간을 파고들었다. 동점골이 그렇게 나왔다. 다만 상대 박스 부근에 우리 선수가 부족해 너무 내려와서 볼을 받은 부분은 손봐야 한다.
20일 가까이 사활을 건 고지대 훈련도 칭찬해야 한다. 고지대 적응을 아예 하지 않은 체코 선수들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후반 15분쯤부터 발이 무거워졌다. 그걸 간파한 공격적인 교체가 승리를 만들었다.

11일 오후(현지시간) 멕시코 과달라하라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한국과 체코의 경기에서 승리한 뒤 홍명보 감독과 코칭 스텦이 환호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월드컵을 앞두고 홍 감독의 스리백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어느 팀이 ‘우리는 포백을 쓰겠다, 스리백을 쓰겠다’고 미리 말하겠나. 상대가 다 알게 되는데. 월드컵마다 감독을 둘러싼 잡음은 늘 있었다. 나는 결과가 나온 뒤 평가하는 게 맞다고 말해왔다. 물론 결과가 나쁘면 나부터 비판할 거다. 잘못했을 때 질타받는 게 감독이고 선수다.
같은 조 멕시코가 남아공을 2-0으로 이긴 경기도 봤다. 멕시코는 걸출한 스타는 없지만 조직력과 좁은 공간 패스워크가 좋은, 무서운 팀이다. 체코보다 버거울 거다. 우리와 팽팽한 경기가 될 것 같다. 다만 우리는 역전승의 기세를 토너먼트까지 끌고 갈 수 있다. 축구는 기세다.
데킬라를 아직 안 드셔 본 분도 있을 거다. 맛이 어떠냐고? 오늘 체코전 역전승 같은 맛이다.
마지막으로, 못된 축구 선배라 미안한 마음이지만 후배들에게 간곡히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이번 월드컵, ‘부담감을 갖고’ 좋은 성적을 내달라. 지금 한국 축구가 너무 안 좋다. 여러분이 그걸 바꿔 놓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여러분은 바꿔 놓을 거다.
과달라하라=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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