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20.
유난히 추웠던 지난해 크리스마스, 인천 영종도 인스파이어 아레나에서 열린 한 지상파 방송사의 연말 특집 가요 프로그램 공연을 취재차 찾았다. 이날 공연은 외국인 팬들만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공연 시작은 오후 5시였지만, 케이(K)팝 가수들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 한국에 온 외국인들은 이른 아침부터 공연장에 도착해 시간을 보냈다.
건물 내부는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식당이나 카페에 자리를 잡으려면 적어도 1~2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공연 전까지 머무를 곳이 마땅치 않던 관람객들은 복도에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 오랜 기다림에 지칠 법도 했지만, 막상 공연이 시작되자 팬들은 각자 준비해 온 응원 봉을 흔들며 K팝 가수들에게 아낌없는 환호를 보냈다.
이날 공연을 보러 온 해외 팬 대부분은 공연 일정에 맞춰 한국행 항공권을 끊고 숙박 시설을 예약했을 것이다. 또 한국에 도착한 뒤 끼니마다 식사하고, 각종 화장품과 식료품을 구매했을 것이다. K팝 공연이 단순한 문화 이벤트를 넘어 인바운드 관광 수요와 체류형 소비를 창출하는 핵심 동력이 된 셈이다. 이처럼 K팝 공연은 전통적인 제조업과는 형태가 다르지만, 외화가 유입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수출 산업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제조업 수출에 산업단지와 물류·항만 인프라가 필요하듯, K팝 산업은 가수들이 설 무대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은 K팝 산업의 성장 속도를 인프라가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현재 서울에서 대규모 K팝 공연을 사계절 안정적으로 치를 수 있는 공연장은 사실상 1만5000석 규모의 올림픽 체조경기장(KSPO DOME)이 유일하다. 2만석 규모의 고척스카이돔은 매년 프로야구 시즌에 대관이 불가능하다.
6만6000명 이상 수용 가능한 상암 월드컵경기장은 잔디 훼손 문제로 대관에 소극적이다. 5만석 규모의 잠실종합운동장 주 경기장과 2만5000석 규모의 잠실 보조경기장은 현재 리모델링 공사가 진행 중이다. 주 경기장은 공사가 마무리돼도 2031년까지 프로야구 경기장으로 쓰인다.
이런 여건 탓에 4만석 규모의 고양종합운동장과 1만5000석 규모의 인천 인스파이어아레나가 주로 활용되지만,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한계가 있다. K팝 공연은 공연 전후 수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동선, 대기 공간, 식음 시설, 교통망이 충분해야 한다. 그러나 수도권 공연장 상당수가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공연 인프라가 부족하다 보니 외화 유입 효과가 큰 ‘외국인 전용 K팝 공연’ 역시 활성화되기 어렵다. 한 공연 업계 관계자는 “외국인 전용 공연을 추진하려고 하면 국내 팬들 사이에서 ‘우리도 보기 힘든데 왜 외국인을 먼저 챙기냐’는 반발이 나온다”고 했다.
그 결과 정상급 K팝 아티스트들은 월드 투어 과정에서 한국보다 일본, 싱가포르, 홍콩, 미국 등 해외에서 더 많은 공연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K팝이 만들어내는 막대한 부가가치가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소비되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부도 공연 인프라 문제에 대해 인지하고 있다.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지난달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장기 과제로 5만석 규모 돔구장 건립 필요성을 언급했고, 올해 부지와 재원(기금) 마련 등을 위한 연구용역에 약 8억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문제는 속도다. 통상 공연장 하나를 짓기 위해선 부지 선정, 교통·소음 등 환경영향 검토, 인허가, 지역 수용성, 재원 조달 등 거쳐야 할 과정이 많아 수년이 소요된다. 실제로 카카오가 서울 도봉구 창동에 조성 중인 ‘서울아레나’는 여러 변수로 인해 완공 목표 시점이 2025년에서 2027년 상반기로 늦춰졌다.
공연장 확보가 늦어질수록 K팝이 만들어내는 관광 수출 효과는 줄어들고, 그 빈자리는 다른 국가와 다른 도시의 공연장이 먼저 채우게 된다. ‘K팝 종주국’이라는 이름이 공허한 상징에 머무르지 않으려면, K팝이 만들어낸 과실을 국내에서 거둘 수 있는 무대를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정재훤 기자 hwon@chosunbiz.com
Copyright ⓒ 조선비즈.
'Opinion & Column'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동훈 배신자’ 논란, 뜨겁게 붙으라 (1) | 2026.02.02 |
|---|---|
| "세계 3위 한국도 있잖아!" 日 폭풍 '경계' 나섰다…일본 여자 컬링 8연속 올림픽 '시상대 경쟁 치열하다' (0) | 2026.02.02 |
| 주가가 오르는데 뭐가 문제냐고? (0) | 2026.02.02 |
| 코스피 5000은 ‘실적’, 코스닥 3000은 ‘기대’?… PER 7000배라는 신기루 (0) | 2026.02.02 |
| [살며 사랑하며] 살아가기 (0) | 2026.0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