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 글, 오종문)
1. '이승만 라인'을 선포하다
6.25 때 낙동강 전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매일 벌어지고 있을 때 "남한 정부를 돕기 위해 일본군이 지원된다면 어떤가?"라는 미군의 질문에 "일본군이 상륙한다면 일본군부터 물리치고 볼 것"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이승만입니다. 이른바 이승만의 '왜관 발언'입니다.
과연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때 맥아더는 수많은 일본 배들을 인천 앞바다까지 동원, 군수지원함으로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은 단 한 사람도 인천에 상륙하지 못했지요.
당시 일본 총리는 인천상륙작전에 일본이 기여했으므로 조선에 남아 있는 일본 재산(적산, 敵産, enemy property)을 돌려달라는 요청을 정중하게 맥아더에게 전달했지만 맥아더는 그 요구를 묵살해버립니다.
'전범국 패전국놈들 살려두었으면 감지덕지 해야지 재산은 뭔 재산?'
ㅎㅎㅎ...
1952년 1월 18일, 아직 6.25 전쟁이 한창이던 무렵,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령 ‘대한민국 인접 해양 주권(maritime sovereignty)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을 일방적으로 선포합니다. 이승만은 이 경계선이 한국과 일본 사이의 평화를 유지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밝히고 '평화선'이라 명명하였습니다. 해외에선 '이승만 라인(Syngman Rhee Line)'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당시 국제법 상 영해의 기준은 3해리(5.56km)였으나, 이승만은 그 20 배인 60해리(111.1km)를 평화선으로 선포했으니 이는 통용되던 국제법을 어긴 조치였습니다.
미국으로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조치였으므로 말이 많아졌습니다. 이승만 라인 선포 한 달 뒤인 2월 12일 미국은 "평화선을 인정할 수 없다"고 이승만에게 통보했으나 이승만은 미국의 통보를 무시합니다. 막 나가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
2. '맥아더 라인(MacArthur Line)'!
그래서 최강대국이 미국이 다시 바다에 선을 그엇습니다. 그 라인 이름이 아래 지도에 나오는 '맥아더 라인(MacArthur Line)'!
이때는 맥아더가 유엔군 사령관 자리에서 물러나고 2대 리지웨이 장군을 거쳐 3대 유엔군 사령관이 Mark Wayne Clark 였기에 Clark line이라고도 불리웁니다. 그래도 오늘날에는 일본에서도 맥아더 라인이라고 부릅니다. 맥아더가 그만큼 일본 역사에서도 비중 있는 장군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아래 지도에서 '이승만 라인'과 'MacArthur Line'을 비교해 보세요. 큰 차이가 없어요. 거기서 거기...!!!
더글라스 맥아더는 태평양 전쟁을 마감 지은 장군으로서 미국 의회나 대통령의 승인 없이도 얼마든지 음으로 양으로 한국을 지원해줄 수 있었던 위치에 서 있었습니다.
그 맥아더는 중립적인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맥아더의 눈에 일본은 진주만 기습 공격을 가했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미군 40여 만 명을 죽게 한 전범국가요 전쟁 중 패전이 분명한 상태인데도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 악랄하게 저항했던 못된 놈들의 나라였습니다.
반면 한국은 수십 년동안 태평양전쟁을 예언하고 경고했던 친구 이승만의 나라였으니 맥아더와 미군 장군들로서는 중립을 지켜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당시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한 일본은 미 군정 하에서 주권도 없던 시기, 뭐라고 목소리를 내봤자 누가 들어주지도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한국도 전쟁 중에 경황이 없었지만 노련한 이승만은 그런 절묘한 시기에 평화선, 이승만 라인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는 먼 훗날을 위한 포석이었습니다.
3. 일본 배가 들어오면 나포하라!
그 라인을 보십시오. 울릉도 독도를 포함하고 그 주변의 황금 어장이 다 들어갑니다. 먼 훗날 후손들의 먹거리가 나오고 광물이 얼마나 묻혀 있는지 모르는 그 바다, 이제는 전략적인 가치로도 숫자 환산이 불가능한 그 바다를 어수선한 시기에 힘없는 한국이 선포하고 장악한 것입니다.
그 라인 안의 수역은 오늘날 배타적 경제수역과도 비슷한 개념이기는 하지만 실상은 영해로서 선포된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이승만은 그 안에 들어온 일본 배들을 나포했습니다. 나포 시 선내의 모든 물건과 장비를 몰수했고 일본인 선원들은 모두 구속해 재판에 회부했지요. 훗날 그들이 풀려나도 배를 돌려주지는 않았습니다.
1955년에는 내무부 치안국에 해양 경찰대를 창설하여 이승만 라인을 침범한 일본 선박을 적극적으로 나포하여 1965년 한일어업협정 체결 때까지 총 328척의 일본 선박을 끌어옵니다. 그 과정에서 3,929명의 일본인이 부산, 거제도, 제주 한림항 등에 설치된 대한민국 법무부 형무소에 구금당했고 그 가운데 44명의 일본인이 사망...!!!
그런 이승만을 '친일파'라고 부르는 자들은 뇌가 없는 사람들이지요!
4. 한일어업협정과 김대중 라인
그러나 6.25 이후 일본 경제는 불같이 일어나고 그에 비해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지요.
원래 맥아더는 일본을 동양의 스위스로 만들어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일본을 농업국가로 만들려고 계획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6.25 전쟁이 터지자 일본에 공장을 돌려야만 군수품 지원이 가능했습니다. 아니면 군수품이 태평양을 건너와야 했으니까요... 6.25 덕분에 일본 경제는 급성장했고 전쟁끝에 한국은 피폐해졌지요.
하지만 이후 한국 정부와 해군 해경은 이승만 라인을 온전히 지킬 수 없었습니다. 성능 좋은 일본 어선들이 얼마든지 이승만 라인에 들어와서 조업하고 도망쳐도 한국으로서는 잡을 방법이 없었고 이로 인해 끝없이 잡음이 들려왔습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韓日基本條約) 1차 어업협정이 맺어지고 협상 과정에서 일본 측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기존의 이승만 라인, 평화선은 무력화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독도 인근을 공동어로구역으로 설정하여 이후 독도를 둘러싼 여러 갈등의 빌미를 제공하였지요.
그후에도 일본은 엄청난 경제 대성장을 이루어냅니다. '소니'와 '워크맨'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약진으로 전세계 경제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힘이 생긴 일본은 1998년 1월, 1965년 체결된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한다고 선언합니다.
국제 사회는 원래가 법이 아니라 힘으로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원래 세상이란 다 그런 것이지요.
그리고 1998년 11월 다시 신한일어업협정이 맺어지고 1999년 1월 22일 정식 발효됩니다.
IMF체제 하에서 을의 위치에 있던 한국 정부는 독도를 중간수역으로 두고 일본의 요구를 대폭 수용한 협정을 맺었던 것입니다.
그때 대한민국 대통령이 누구였느냐? 도요타 다이쭈(豊田 大中), 김대중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동해 상에 김대중 라인이 그려지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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