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 Column

역주행 도서가 반가운 이유

dalmasian 2026. 6. 5. 11:06

[카페 2030]  2026.06.04.

서울 교보문고 광화문점 베스트셀러 서가. /장련성 기자

차량 역주행은 위험천만한 사고로 이어질 수 있지만, 책 역주행은 사건이다. 출간일로부터 시간이 지나면 판매량은 떨어지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요즘 출판 시장에선 역주행이 ‘뉴노멀(새로운 표준)’이다. 옛날 책이 다시 독자의 선택을 받는 경우가 늘고 있어서다. 출간 당시엔 전혀 흥행하지 않았다가 몇 년이 지나 인기를 끄는 경우도 있다. 문학 분야에서 이런 흐름이 두드러진다.

온라인 서점 예스24는 ‘역주행’을 올해 상반기 도서 시장 핵심 키워드로 꼽았다. ‘스크린셀러’가 이런 역주행 현상을 주도한다고 봤다. 영화 개봉·OTT 공개 등으로 원작이 다시 주목받는 경우다. 집계에 따르면, 앤디 위어의 2021년 작 SF 장편소설 ‘프로젝트 헤일메리’가 동명의 영화 덕에 올 상반기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인플루언서 추천과 독자 입소문도 큰 영향을 미친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양귀자의 ‘모순’ 등은 역주행을 넘어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판매 차트를 역주행하는 책은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에 “흥!” 하고 도도하게 콧방귀를 뀐다. 독자의 선택을 받지 못한 책은 시장에서 밀려나고,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 마련. 많은 이야기가 그렇게 사라진다. 작가가 공들여 세공한 이야기가 이토록 허망하게 휘발되는 건가 싶을 때, 우연한 계기로 어떤 책은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한다. 이런 책에는 시간의 흐름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내 갈 길 가겠다는 거침없는 기세 같은 것이 있다. 인간은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제약을 책은 가뿐히 뛰어넘는다.

문득 몇 달 전 개봉한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자면,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패션 잡지 ‘런웨이’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1편에서 보여준 패션 업계의 빛나는 화려함은 온데간데없다. 빅테크 회사에 잡지사를 팔아넘기려고 하는 경영진에 맞서 편집장 미란다(메릴 스트립)와 에디터 앤디(앤 해서웨이)가 힘을 합치는 다소 ‘짠한’ 이야기.

뇌리에 박힌 장면은 콧대 높던 미란다가 자존심을 구기고 빅테크 회사 대표인 벤지에게 “인수 후에도 런웨이의 전통을 존중해 달라”고 부탁하는 대목이다. 그러자 벤지는 “미래가 폼페이의 용암처럼 돌진해 오고 있다”고 답한다. 그러면서 그는 “AI가 모든 걸 대체한 미래에는 모델도, 디자이너도, 런웨이 쇼도 필요 없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심드렁하게 말한다. 미란다는 할 말을 잃는다.

철딱서니 없는 캐릭터인 앤디가 돼 그 자리에 끼어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왜 미래에 굴복하나요? 빅테크 회사 대표라면서, 시간을 정복할 생각은 안 하시나요? 탁월함을 발휘할 생각은요?” 벤지에게 역주행 도서를 들이밀면서 수십 년, 아니 백 년이 지나도 열렬히 소비되고, 사랑받는 책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어졌다. 좋은 이야기에는 시간을 초월하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미약할지언정 시장에서 그 힘을 목격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황지윤 기자 noyj@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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