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2026.06.04.
반년 뒤도 모르는 반도체 사이클
대규모 이익에도 기업은 살얼음판
분배 논란에 골든타임 허비하면
미래 위기 자초하는 결과 부를 것
삼성전자 초기업노조의 파업 위협이 한창일 때, 삼성전자 관계자는 “HBM(고대역폭 메모리) 후발 주자로서 ‘경쟁사 대비 헐값에 주겠다’며 구걸하듯 영업하고 다녔다. 그게 불과 6개월 전 일”이라고 했다. 반년 뒤 대호황을 예측조차 못한 채 빅테크들 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을 만큼 반도체 사이클이 예측 불허라는 얘기다. 거꾸로 말하면, 지금의 역대급 반도체 호황도 6개월 뒤 어떤 이유로 신기루처럼 사라질지 모르는 공포스러운 현실을 보여준다. AI 붐이 그만큼 강력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메모리 반도체의 민낯이기도 하다. 빅테크 수요에 종속된 채 호황기에는 잠시 칼자루를 쥐었다가 사이클이 꺾이면 가격 결정권을 내줘야 하는 K-반도체의 숙명이다.
그 뼈저림을 너무도 잘 아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경영진은 초유의 대규모 이익 행진 와중에도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우리가 혹시 놓치고 있는 돌발 변수가 없나’ 하는 근원적 불안감에 두 회사 수뇌부는 강박적으로 수요처와 해외 동향을 체크하고 각계 의견을 청취한다고 한다. 물론 시장에선 ‘수퍼 사이클 지속론’이 나온다. 천문학적 자금이 투입되고 감가상각 기간이 훨씬 긴 ‘AI 데이터센터’가 주도하는 이번 사이클은 과거 사이클과 달리 쉽게 꺼지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나 산업의 역사에서 ‘이번엔 다르다’는 낙관론만큼 위험한 신호도 없었다. 3년 전 7조7000억원 적자를 낸 SK하이닉스가 지난해 47조원 영업이익을 냈듯, 그 역(逆)이 불가능하다는 어떤 보장도 없다.
진짜 문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고민이 두 기업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올해 5월 1~20일 기준 전체 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율은 41.7%로 1년 전보다 19%포인트나 뛰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시가총액 합계가 처음으로 코스피 전체의 절반을 넘어섰다. 두 회사가 내는 법인세가 국가 세수 규모를 좌우한다. 특정 기업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는 한국 경제를 위태롭게 한다. 두 회사가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동안 다른 제조업과 내수업종, 건설 분야는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천문학적 영업이익이 우리 경제의 ‘K자형 양극화’를 숨기는 가림막이 되고 있다.
지금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다음 반도체 다운턴(하강 국면)을 버텨낼 기초 체력을 비축하고 기술 격차를 벌려야 하는 골든타임이다. 하지만 오늘 눈앞에 보이는 호황의 숫자가 온갖 명분의 분배 청구서로 이어지고 있다. 삼성전자 내부의 성과급 파열음은 봉합됐지만, 정부와 여당 일각에선 반도체 대규모 이익을 마르지 않는 ‘화수분’으로 여기는 듯하다. 민주노총 출신 노동부 장관의 ‘초과이익 배분론’만이 아니다. 재계에선 “지방선거가 끝나면 각 기업이 대규모 지방투자 발표를 내놓을 것”이라는 얘기가 돌고 있다. 그 투자가 기업 생존에 반드시 필요하냐는 질문은 무의미한 분위기다. 분기 수십조 영업이익을 올리는 기업이 권력 앞에서 “반년 뒤도 장담할 수 없다”며 우는 소리를 하기란 불가능하다.
밖으로는 경쟁의 강도와 지정학적 비용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파운드리 점유율은 TSMC 72%, 삼성 7%로 격차가 더 벌어졌다. 메모리에선 중국 CXMT가 글로벌 D램 점유율 8%에 도달하며 한국이 일본을 밀어낸 방식 그대로 추격해 오고 있다. 미국의 첨단 장비 반입 봉쇄로 중국 내 삼성 시안·SK 우시 공장의 미래는 불투명하고, 트럼프발 관세 폭탄을 피하려면 미국 내 대규모 투자를 지속해야 할 상황이다. 반도체 경영진의 살얼음판 걷기가 ‘쇼’나 기우(杞憂)로 치부되면 진짜 위기가 시작될 것이다.
이길성 기자 atticu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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