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 Column

하나님과 아담의 닿지 않은 손…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 긴장감

dalmasian 2026. 6. 21. 06:47

2026.06.20.
[신학자의 미술관 산책]

미켈란젤로, ‘천지창조 : 아담의 창조’(1501), 프레스코, 280×570㎝,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천지창조’(1508~1512)는 단순한 성경 삽화가 아니다. 그것은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인간 이해의 혁명, 그리고 이후 모더니즘으로 이어질 서곡이었다. 특히 하나님과 아담의 손끝이 거의 닿을 듯 멈추어 있는 그 순간은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바뀌는 역사적 순간이다.

중세 초기 세계관은 주로 플라톤의 영향을 받았다. 인간 삶은 영원을 향한 순례였고 현실 세계는 궁극적 목적지가 아니었다. 육체는 종종 영혼보다 열등한 것으로 이해됐고 예술 역시 초월적 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기독교 신학으로 수용하면서 새로운 전환이 일어났다. 창조 세계와 인간 이성, 경험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이 자리 잡았다.

르네상스는 이러한 사상적 전환이 꽃을 피운 시대였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개체의 의미를 찾고 각각의 개별자에게 초점을 맞췄다. 이 시기 화가들이 개인을 묘사하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세계관 변화에 기인했다. 개인에 대한 인식 전환은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에 관심을 갖게 했고, 당시 예술가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그리스-로마 시대 작품을 모방하면서 예술 세계를 펼쳐나갔다.

미켈란젤로, ‘다비드’(1501~1504), 대리석, 517×199㎝, 피렌체 우피치 광장.

미켈란젤로 역시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고자 했다. 그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들을 연구하면서 가장 이상적이고 완전한 인간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대표적 작품이다. 다윗은 한쪽 다리를 약간 옆으로 내밀고 서 있다. 왼쪽 어깨에는 골리앗을 물리치기 위한 돌팔매 줄이 걸쳐 있고, 오른손으로는 돌을 쥐고 있다. 강렬한 시선에서 우리는 자신에 찬 눈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르네상스적 인간을 본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시스티나성당 천장화 ‘아담의 창조’를 보면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특징을 발견한다. 중세 예술이 하나님의 초월성과 영광을 강조하면서 인간을 상대적으로 작고 왜소한 존재로 묘사했던 것과 달리, 미켈란젤로의 아담은 작고 비천한 존재가 아니라 근육질의 완벽한 인간의 모습이다. 그는 하나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로서 위엄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생명뿐 아니라 이성과 창조성, 그리고 무한한 가능성을 부여받은 존재로 묘사된다.

하나님은 흰 수염의 노인 모습으로 묘사됐으며 소용돌이치는 망토에 둘러싸여 있다. 반면 왼쪽 아래에 위치한 아담은 완전히 벌거벗은 모습으로 표현됐다. 하나님의 오른팔은 뻗어 있으며 자신의 손가락으로부터 아담의 손가락에 생명의 불꽃을 전달하려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아담은 이미 창조된 존재이지만(창 2:7) 아직 생명이 부여되지 않은 상태로 묘사된다. 그의 왼팔은 하나님의 자세를 반영하듯 비슷한 형태로 뻗어 있는데, 이는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창 1:26)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선언을 상기시킨다.

많은 연구자들은 하나님을 둘러싸고 있는 붉은 망토와 천사들의 배치가 인간의 뇌 단면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해 왔다. 이는 미켈란젤로의 의도였는지 여부를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해부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그가 이러한 형상을 의도적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도 어렵다.

만일 그렇다면 미켈란젤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단순히 육체적 생명만을 부여하신 것이 아니라, 사고하고 창조하며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이성과 지성, 그리고 무한한 가능성까지 선물하셨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특히 아담은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존재처럼 보인다. 그는 누워 있지만 동시에 일어나려 한다. 손끝은 아직 하나님께 닿지 않았지만 이미 생명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이 장면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가능태(dynamis)’와 ‘현실태(energeia)’를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이것이 르네상스가 인간에게서 발견하고자 했던 새로운 인간상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더 이상 죄와 연약함 속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이성과 창조성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며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해 갈 수 있는 존재였다.

어쩌면 하나님과 아담의 손끝 사이에 남겨진 그 작은 틈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인간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르네상스 이후 서양 문명은 그 틈을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과학을 발전시키며 사회를 개혁하고, 마침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인간이 자신 안에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수록 점차 그 가능성의 근원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은 잊혀져 갔다. 르네상스의 인간 중심주의는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의 존엄에 대한 찬가였지만, 근대에 이르러서는 인간 자신이 모든 것의 척도가 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런 의미에서 ‘아담의 창조’는 서양 문명의 위대한 가능성과 동시에 그 내면에 숨겨진 긴장을 함께 보여 주는 작품이다. 하나님을 향해 뻗어 있는 아담의 손은 인간의 존엄과 창조성, 그리고 무한한 가능성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 손끝이 끝내 하나님과 완전히 맞닿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간이 결코 스스로 완성될 수 없는 존재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미켈란젤로는 자신도 알지 못한 채 르네상스가 열어젖힌 인간의 시대와 그 이후 전개될 서양 문명의 찬란한 성취와 비극을 동시에 천장 위에 그려 놓았는지도 모른다.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그 작은 간격 속에는 인간의 위대함과 한계, 진보에 대한 희망과 자기 절대화의 위험이 함께 담겨 있다. 그 틈은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가능성은 어디서 오는가. 인간은 과연 스스로를 완성할 수 있는 존재인가.

라영환 총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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