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2026.01.26.

신준섭 경제부 차장
선진국과 개도국 갈등 넘어
선진국 간 경쟁도 치열해져
사다리 위에서 버틸 대책 있나
장하준 런던대 경제학과 교수의 저서 ‘사다리 걷어차기’는 선진국들의 모순된 행태를 꼬집은 대표적인 경제학 도서로 꼽힌다. 저서는 부유해지기 위해 자국 산업을 보호했던 이들이 개발도상국에는 시장 개방을 요구하는 일련의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저서에서 장 교수는 불공평했던 각국의 출발 지점을 ‘기울어진 축구장’이라 표현했고, 선진국들의 행위를 ‘사다리 걷어차기’로 규정했다. 사다리가 끊긴 국제사회는 부의 양극화 심화 과정에 돌입했다.
선진국 주도의 사다리 걷어차기 이후 세계는 자유무역주의 시대를 구가했다. 하지만 불안하게나마 수십 년간 유지해 온 이 체제는 최근 붕괴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피아 식별 없는 ‘관세 전쟁’이 도화선이 됐다. 주요 2개국(G2)의 한 축인 중국도 마찬가지다. 미국에 대응해 관세 보복을 하기도 하고, 비관세 장벽이라는 카드도 수시로 활용한다. 최근 중국이 일본에 희토류 등 물자 수출을 금지한 것이 단적인 사례다. 관세를 동원해 요구를 관철하고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 행태는 사다리가 존재하던 시절과 닮아 보인다.
다만 이 흐름을 20여년 전에 출고된 사다리 걷어차기로만 설명하기는 힘들다는 판단이다. 보복성 조치와 같은 전통의 보호무역주의에 ‘안보’가 끼어든 탓이다. 군사력을 불쏘시개 삼은 보호무역주의는 장 교수의 저서 속에는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더 위험한 갈등을 불렀다.
지금은 불합리하나마 이성적으로 풀면 그나마 다행인 지경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처럼 아예 전쟁까지 치닫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도 무력 충돌 가능성을 수시로 시사한다. ‘설마’ 하고 웃어넘길 수가 없다. 미국은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현지에서 무력으로 체포해 자국으로 송환했다. 군사 작전을 펼쳐 다른 주권국 내정에 개입한 것이다. 그러면서 신무기까지 자랑하고 나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24일(현지시간) 공개된 미 일간 뉴욕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적의 장비를 무력화하는 ‘디스컴버뷸레이터(Discombobulator)’의 존재를 공개했다. 우회적으로 세계 전체에 무력을 과시한 것이다. 국제 정세들만 본다면 중국의 대만 침공 시나리오도 현실 가능성이 없다고 단언하기 힘들다.
최근 현상 중 특히 두드러지는 건 선진국끼리도 얼굴을 붉히는 일이 다반사가 됐다는 점이다. 미국은 유럽연합(EU)과 밀접한 그린란드에 대해서도 야욕을 감추지 않는다. 이에 발끈한 EU 8개국은 그린란드에 군대를 파병했다. 합심해서 개도국을 압박하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선진국들 역시 한정된 자원을 둘러싸고 싸움을 서슴지 않는다.
자원의 종류가 많다 보니 화해할 만한 접점을 찾기가 힘들다. 자원의 종류는 영토에 에너지 자원, 핵심 산업 등 다양하다. 종합해 판단해보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던 국가들이 발 디뎠던 풍성한 대지는 이제 메마른 듯하다. 서로를 ‘사다리 위에서’ 밀쳐내 밀집도를 줄여야만 부귀영화를 존속할 수 있는 상황까지 몰린 것으로 보인다.
이런 국제 정세는 선진국에 사다리를 걷어차이기 전 막차를 탔던 한국의 입장을 복잡하게 만든다. 한국은 자유무역 질서의 대표적 옹호자로 자리매김했다. 현재도 원론적으로는 이 입장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보호무역주의가 득세한 국제 정세 위에 펼쳐진 아슬아슬한 줄타기 게임을 피하지는 못했다. 벼랑 끝에서 곡예를 펼쳐야만 살아남는 형국이다.
현재까지는 정부가 균형을 잘 잡은 덕분에 줄에서 떨어지지 않고 버텨내고 있지만 상황이 변할 가능성이 작지 않다. 최근 미 국방부가 발표한 국방전략을 보면 미국에 한국을 지켜내는 일은 더 이상 최우선 주요 과제가 아닌 듯하다. 국방과 관련한 우려는 경제 불확실성을 키운다. 역대 최고 수출액과 코스피 5000 달성은 괄목할 성과지만 여기에 취해 있을 수 없게 됐다. 정부가 자칫 사다리 위에서 걷어차이는 일이 없도록 대비하길 바란다. 이번 싸움은 국방이 경제다.
신준섭 경제부 차장(sman32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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