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을 하며] 2026.02.06.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모습. photo 뉴시스
며칠 전 기업 M&A 시장에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변호사와 저녁식사를 했다. 그날은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참석자들의 자기 고백이 이어졌다. 오래 그를 알았지만 그가 어떻게 자라고, 개인적으로 어떤 삶을 사는지 들었던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사법고시에 '소년급제'한 그는 검사도 할 수 있었지만, 연수원 시절 검사 시보를 하면서 '검사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바로 변호사의 길로 들어섰다. 이른 나이에 국내 최대 기업의 법무실 등을 거쳐 지금은 기업 M&A 관련 일을 하고 있다. 경영권 분쟁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그는 '공부하면 불행해진다'는 삶의 원칙을 갖게 됐고, 그 원칙을 그대로 자식교육에 적용하고 있다.
반포에서 중3, 초3 아이를 키우는 그가 자식들에게 요구하는 원칙은 '집에서 공부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집에 책상도 없다. 첫째는 학교가 끝나면 다른 아이들이 학원에 갈 때 집으로 왔다고 한다. 놀 친구가 없던 첫째는 우연한 기회에 물고기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틈만 나면 노량진 수산시장에 놀러 갔다. 그러면서 방어, 우럭 등을 사서 비닐봉지에 담아 와 집에서 키웠다. 집에 수족관이 점점 커지다가 결국 화재가 날 뻔해서 수족관을 없앴다. 그러면서 노량진 수산시장 상인들과 친해져 중3인 지금도 틈만 나면 수산시장에 간다고 한다. 거기서 외국인 노동자들과도 친구(?)가 됐다. 수산시장이 놀이터다 보니 몸에서는 항상 비린내가 났다고 한다. 그런 형을 보며 초3인 둘째는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공부를 안 하면 형처럼 몸에서 비린내가 나는 삶을 살 것 같다고 생각했단다. 그러면서 아빠에게 책상을 사달라고 했고, 아빠는 '공부하면 불행해진다'는 본인의 원칙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자식을 뜯어말리지는 못 했기 때문이다.
방학인 요즘 자기가 집에 들어가면 중3인 첫째는 새벽에 수산시장에 놀러 가기 위해 초저녁부터 자고, 초3 아들은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변호사는 '팔자가 있는 모양'이라며 즐거워했다. 아마 이런 얘기를 들으면 대부분은 첫째의 미래를 속으로 그려볼 것이다. 나도 잠시 그려봤다. 남들이 보기에 거꾸로 삶을 사는 첫째, 스스로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둘째. 그리고 둘 모두를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아빠. 누가 낫고, 누가 걱정되냐는 질문을 속으로 던져봤지만 어느 질문에도 답할 수 없었다. 비린내가 나는 삶이든, 연필 냄새가 나는 삶이든 자기 삶을 자기 것으로 만들며 살아가는 아이들. 7세 고시도 모자라 4세 고시까지 유행하는 요즘 세상에서 꽤 오랜만에 '잘 크고 있다'는 말의 다른 의미를 배웠다. 50세를 바라보는 나도 그들의 삶에서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남이 정해준 삶을 공식처럼 외워 살아간다면 그게 가장 불행한 삶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박혁진 편집장 spaingog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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