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 Column

‘사요나라, 아라시’와 성숙한 팬덤

dalmasian 2026. 6. 2. 08:31

[특파원 리포트] 2026.06.01.

일본 국민 아이돌 아라시의 은퇴 공연이 열린 지난 31일 도쿄돔호텔 창문에 '일본의 보물 아라시, 고마워'라는 등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X(옛 트위터)

지난 31일 새벽 일본 도쿄 분쿄구 도쿄돔호텔 앞. 캄캄한 거리에 별안간 불빛들이 새어 나왔다. 호텔 투숙객들이 저마다 창문에 글자를 적은 포스터를 붙인 뒤 일제히 객실 조명을 켠 것이다. 창문들엔 이런 문구가 적혔다. “일본의 보물 아라시(嵐·폭풍), 지금까지 고마웠어!”

일본 국민 아이돌이자 5인조 남성 그룹 아라시가 도쿄돔에서 은퇴 공연을 연 날이었다. 지방에서 온 팬들이 작별 인사를 위해 소박한 이벤트를 준비한 것이다. 1999년 데뷔해 첫 주에만 앨범이 약 60만장 팔릴 정도로 시대를 풍미한 가수지만, 이날 5만여 석을 채운 팬들의 모습은 신기하리만치 차분했다. 전철역과 공연장을 오가는 수만 명의 행렬은 약속이라도 한 듯 질서 정연했다.

이 ‘성숙한 이별’은 아라시의 깊은 배려가 만든 결과다. 아라시가 전격 은퇴를 발표한 것은 1년 전인 지난해 5월 6일. 팬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함이었다. 소속사(쟈니스 사무소) 창업주의 성 착취 폭로로 회사가 공중분해되는 사태에서도, 이들은 뿔뿔이 흩어지기보다 팬들의 상처를 보듬는 길을 택했다.

이 지점에서 한국의 대중문화 산업을 떠올리게 된다. 한국 아이돌 산업은 일본보다 출발이 늦었지만 현재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규모는 압도적이다. 가창·안무는 물론 기획·자본력 등 모든 면에서 K팝이 J팝을 뛰어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대중의 공공 공간을 대하는 팬덤 문화와 이를 관리하는 기획사의 매뉴얼만큼은 여전히 일본을 배울 필요가 있다. 일본 대형 아이돌은 전통적으로 전철역이나 공항, 방송국 등 일상 공간에서 팬들이 진을 치고 대기하는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한다. 2019년 아라시 소속사 후배 헤이세이점프는 일부 팬의 대중교통 매너 위반을 이유로 콘서트를 전면 취소하는 초강수를 뒀다. 아라시도 길거리에서 멤버들에게 선물을 주는 행위마저 금지하며 ‘오시카츠(推し活·팬덤 문화)’가 공공 예절의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수차례 고지했다.

한국의 현실은 어떤가. 아이돌을 비롯한 유명 연예인이 출국하는 날이면 공항은 몇 시간 전부터 몰려든 팬들로 마비가 된다. 최근에는 인기 스타를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사설 경호원이 일반 승객을 향해 강한 플래시를 쏘거나 일부 시설을 점거하는 등 상식을 벗어나는 일까지 벌어졌다. 스타의 안전을 핑계로 시민의 일상을 방해하고 기획사는 이를 방관하며 마케팅에 활용한다.

세상은 1등이 남긴 화려한 기록보다, 그들이 대중 곁에서 어떤 태도로 머물렀는지를 더 오래 기억한다. 세계가 주목하는 K팝이 아라시의 마지막 무대에서 배워야 할 것은 노래나 안무가 아니었다. 시민의 일상을 배려하고 공공의 가치를 존중하는 성숙한 품격이다. 팬덤이 열정 표현을 넘어 사회 속에서 책임과 예의를 다할 때, 진정한 ‘문화 강국’의 문이 열릴 것이다.

도쿄=김동현 특파원 bo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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