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2026.06.26.

일러스트=박상훈
주말까지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리는 서울국제도서전의 올해 주제는 ‘인간 선언’이다. 평일 오전인데도 현장은 말 그대로 ‘인간 파도’였다. 입장 대기 줄이 100m는 넘어 보였고, 안에선 어깨 부딪히지 않고 걸음 옮기기가 힘들었다. 온라인 중고 마켓에선 표 구한다고 아우성인데, 주최 측은 안전 문제를 고려해 총 티켓 판매량을 작년처럼 15만장으로 제한한다고 했다. 그러니 ‘인간 파도’가 밀려올 수밖에.
▶대한민국 성인 독서율은 매년 최저치를 경신 중이다. 일본은 매달 6권을 읽는데 우리는 연 2권 수준이고, 그나마 10명 중 6명은 아예 읽지 않는다. 그런데 도서전은 이렇게 인기라니 미스터리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한 미스터리 전문 출판사 부스를 지나는데, 기념품 반팔 티셔츠가 눈에 띄었다.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Life is full of mystery”. 역시 인생은 미스터리다.
▶전문가들은 인기 이유로 몇 가지를 제시한다. 독서 인구는 줄었지만, 책 ‘덕후’들은 훨씬 더 깊게 좋아한다. 평소 외로운 섬처럼 혼자 읽다가 축제가 열리니 매일 진심으로 온다는 것이다. 또 요즘 도서전은 책 구매 강요 대신 경험을 제공한다. 주제문을 쓴 김연수를 비롯, 김초엽, 박상영, 김이듬 등 수백 명의 시인·소설가들이 곳곳에서 눈 맞추며 독자와 대화한다. 물론 세련된 책 에코백, 유머와 위트 넘치는 티셔츠, 가방에 다는 키링 등 매혹적인 굿즈(기념품)도 큰 몫 했다.
▶2030이 대부분인 관객들은 부스 곳곳에서 깔깔거렸다. 출판사 김영사는 ‘GYMYOUNGSA’로 간판을 내걸고, 체육관인 척했다. ‘글 손실 No, 체지식량 Up’이라며 “글 손실은 글자를 읽지 않았을 때, 몸에서 글이 빠져나가는 현상”이라고 적었다. 한 추리소설 전문 출판사는 ‘반차 쓰고 복수 좀 하고 오겠습니다’는 제목의 책을 적극 밀었다. 세계문학전집과 책 유튜브로 인기몰이 중인 민음사 부스는 입장을 포기하게 할 만큼 줄이 길었다.
▶굿즈에 눈 멀었다는 비판도 있다. 또 소셜미디어 자랑용 사진 찍기 위해서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누군가 X(트위터)에 후기를 적었다. “전에는 독서 인구 멸종 수준이었잖아요. 작년엔 굿즈만 사려고 기웃대다가 올해는 책도 샀어요. 우리 멸종하지 맙시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찾아와 무거운 책 한 권 품에 안고 돌아가는 청년들이 늘고 있다. 시작은 유행이었을지 몰라도, 문장 안에 머무는 시간만큼은 온전히 자기 것이다.
어수웅 논설위원 jan10@chosun.com
Copyright ⓒ 조선일보.
'Opinion & Column'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늦기 전에 마음껏 놀아라 (0) | 2026.06.27 |
|---|---|
| 도발한 北, 막아낸 美가 한마디도 등장 않는 6·25 기념사 (0) | 2026.06.27 |
| 망상을 공유하는 사람들 (0) | 2026.06.27 |
| 평생 월세 내며 손 벌리고 살라는 ‘약탈 정부’ (0) | 2026.06.27 |
| 삼전닉스 호남 반도체 투자, 李대통령의 직권남용 아닙니까? (0) | 2026.0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