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 Column

행복은 무집착에서 온다

dalmasian 2026. 7. 18. 07:34

[세상사는 이야기]  2026.07.17.

집착을 버려야 진짜 깨달음
꿀따고 꽃을 떠나는 벌처럼
물질은 목적 아닌 삶의 수단
맹목적 무소유는 해답 아냐

자현 스님 중앙승가대 불교학부 부교수

선진국화될수록 아이를 낳지 않는 경향성이 뚜렷하다. 합계출산율 0.71명을 기록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이 분야에서는 단연 으뜸이다. 이 때문에 한국은 '외부의 물리력이 없이도 자연적으로 소멸할 수 있는 나라'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왜 소득수준이 올라가면 아이를 낳지 않는 걸까?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그런데 이 중 가장 흥미로운 주장이 '튀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모두가 "네"라고 할 때 "아니요"라고 하는 것처럼, 유기체라면 당연히 번식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름을 부각하기 위해 거부한다는 설명이다. 유전자를 거스르면서까지 관종 코드가 작동할 정도로 관종 욕구가 강력한지는 잘 모르겠다.

문명이 발달한 곳에서 확대되는 '최소주의'와 '불편함에 대한 추구' 역시 관종 코드로 이해해 볼 수 있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타성 역시 그렇게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이기적 유전자의 돌발행동일 수 있다는 말이다.

최소주의는 소유를 덜어 복잡함을 벗고, 삶의 안정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물질적 풍요가 아닌 삶의 풍요라는 새로운 해법을 대두하는 것이다.

혹자는 최소주의와 무소유를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소유는 없음에 대한 추구라는 점에서 둘은 완전히 다르다.

불교와 비슷한 시기에 인도에서 만들어진 자이나교는 무소유를 지향한다. 해서 이들은 옷을 입지 않는 나체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이런 게 극단적인 무소유다.

붓다는 자이나교의 나체주의를 비판하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이라고 했다. 옷에는 소유의 문제만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예의와 배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기본적으로는 최소주의를 지향한다. 그러나 불교의 목적은 최소주의가 아닌 무집착에 있다. 물질을 수단으로 인식하며 내가 목적이 되는 삶, 이게 바로 무집착의 모식이다.

천수보리의 이야기는 불교가 말하는 무집착이 무엇인지를 잘 나타내준다. 천수보리는 귀족 출신으로 의복에 대한 집착이 강한 분이었다. 이후 붓다의 제자가 되어 누더기(분소의)를 받자, 이를 창피하게 여겨 수행할 수 없었다. 이때 붓다는 천수보리의 상태를 파악하고, 천수보리에게만은 비단옷을 입도록 배려한다. 이렇게 비단옷을 입게 되자, 천수보리는 의복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며 수행에 집중해 깨달음을 얻게 된다. 천수보리에게 비단옷은 목적을 성취하는 중요한 수단이자 도구였던 것이다.

벌이 꽃에서 꿀을 취하듯, 목적을 성취하면서도 자유로운 것. 삶을 리스(Lease)로 살며 자유로운 행복을 영위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불교가 말하는 무집착의 삶이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동물이다. 그 행복은 튀는 관종에서 올 수도 있다. 그러나 물질에 기반한 행복은 언젠가는 무너지게 마련이다.

무너지지 않는 행복은, 집착을 넘어서 존재하는 자유로움에 깃든다.

신문은 사건의 연속이라는 변화를 기반으로 당위성을 확보한다. 제아무리 좋은 특종이라도 그것에 집착해서 맴돌면 더 이상 좋은 신문일 수는 없다.

현재의 사건들을 직시하고 사실을 보도하는 것, 이것이 신문의 역할이다. 어떤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고 올바로 곧게 사건만을 보고 질주하는 태도. 이것이 집착을 넘어선 무집착의 완성이다.

무집착은 불교가 도출한 자유로우면서 완성된 삶의 해법이다. 이 해법은 최소주의의 해법과는 또 다르다. 최소주의가 달팽이 같은 작은 안전을 선택했다면, 무집착은 현재를 밟으며 완전하게 걷는 흔적 없는 걸음이라고 하겠다.

[자현 스님 중앙승가대 불교학부 부교수]

Copyright ⓒ 매일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