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2026.03.21.
구소련과의 냉전이 지속되던
1980년대 집권한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적국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여러 비밀 작전을 수행했다. 당시 윌리엄 케이시 CIA 국장이 구소련을 와해시킬만한 요인으로 눈여겨본 것은 바로 석유였다. 석유가 핵심 수입원이었던 구소련은 1970년대 고유가 덕택에 경제적으로 악화일로를 걷는 와중에도 근근이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점을 노린 레이건 행정부는 사우디가 산유량을 대폭 증가하도록 회유했다. 그 결과 1985년 이후 사우디의 석유 생산량은 하루 200만 배럴에서 500만 배럴로 급증했고, 공급 과잉으로 인해 글로벌 석유 가격이 폭락하면서 구소련 경제는 직격탄을 맞았다. 결국 한계 상황에 몰린 구소련은 1991년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미국의 정치 전략가 피터 슈바이처의 저서 ‘Victory’에 나오는 이야기다. 구소련을 붕괴시킨 원인이 석유 하나만은 아니겠지만,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 질서에서 에너지 패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지금 미국은 또다시 석유를 이용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비록 과거에 상대했던 적과 현재의 적은 다르지만 말이다. 지난 2월 미국이 이란을 폭격했을 당시 미국의 갑작스러운 공격 이유에 대해 갖가지 추측이 난무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내세운 것처럼 이란의 미국에 대한 위협이 임박했는지는 기밀문서에 접근할 수 없는 일반인들로선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미국이 단순히 하메네이 독재 정권 하에서 고통받는 이란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란을 공격했다고 믿는 이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국제 정치는 언제나 이익에 따라 움직이고, 트럼프는 손익 계산이 철저한 비즈니스맨 출신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전쟁을 통한 이득이 손실보다 많다는 판단하에 승부수를 던졌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미국은 전쟁으로 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우선 미국의 패권에 도전장을 내민 중국을 압박하는 것이다. 시장 조사기관 케이플러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은 하루 평균 약 138만 배럴의 이란산 원유를 수입했다. 이란의 해상 원유 수출 물량 가운데 80% 이상을 담당하는 최대 구매국이다. 중국 전체 원유 정제 능력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산둥성의 민간·중소 정유사들이 주로 이란산 원유 수입을 맡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중국의 주요 원유 수입국인 베네수엘라에 이어 이란까지 때린다면 중국 경제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또한 미국은 이란과의 전쟁을 통해 차기 에너지 패권국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과거에 여러 차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이란은 미국의 공격에 대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겠다며 맞섰다. 페르시아 만에서 생산하는 석유의 유일한 해상 출구인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할 경우, 글로벌 에너지 대란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이란의 이러한 대응은 중동에서 생산하는 석유가 국제 상황에 따라 상시 불안 요인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전 세계에 고스란히 노출시켰다. 반면 셰일 가스 혁명을 통해 에너지 자급을 넘어 에너지 패권 국가를 넘보는 미국에겐 이번 전쟁이 에너지 수출국으로서의 위상을 재정립할 도약대가 될 수 있다. 미 에너지 정보청(EIA)에 따르면, 미국의 원유 생산량은 2023년 말 기준 하루 1331만 배럴로 1000만 배럴 수준인 러시아, 900만 배럴을 밑도는 사우디를 압도한다. 내각의 에너지 3대 핵심 요직에 모두 친(親) 화석 연료 인사를 앉히며 ‘에너지 패권(energy dominance)’을 주장한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이란전이 글로벌 에너지 시장에서 미국의 위상을 보여줄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만약 미국이 베네수엘라의 석유 통제권을 가져간 것처럼 이란 정권을 붕괴시키고 호르무즈 해협 관리권을 가져가게 될 경우엔 글로벌 에너지 판의 흐름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덧붙여 그동안 위안화나 암호 화폐 등을 이용해 달러 중심 국제 금융망을 우회하려 했던 베네수엘라와 이란의 시도를 무력화함으로써 ‘페트로 달러’의 위상을 당분간 더 연장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 역시 미국이 전쟁을 통해 얻게 되는 이득이다.
이러한 점들은 아마도 미국이 전쟁으로 인한 득과 실을 계산했을 때 전쟁을 감행하자는 주장에 힘을 실어줬을 것이다. 전쟁을 하기로 결정한 이상,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의 대리 세력이라 할 수 있는 무장 테러집단 헤즈볼라와 하마스의 수장이 이스라엘 공격으로 날아갔다는 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묶여 있고 중국이 군부 숙청 같은 내부 정치 문제로 인해 해외에 신경 쓰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서 지금이 가장 적기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은 한때 유력하게 제기됐던 ‘미국의 중동 이탈’ 시나리오를 완전히 부정하고 있다. 지정학 전략가 피터 자이한은 저서 ‘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에서 에너지 자립을 이룬 미국이 더 이상 중동 문제에 끌려다니지 않고 고립주의로 향하게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이 책이 출간된 지 정확히 10년 후인 지금 세계는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문제는 이처럼 한 치 앞도 예측하기 어려운 국제 정세에서 에너지 약소국인 한국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란 사태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곳이 원유 수입 비중이 높은 아시아와 유럽 국가라고 지목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상황을 레버리지로 이용해 우리나라에도 이미 파병 청구서를 내밀었다. “미국을 돕든 안 돕든 상관없다. 하지만 (돕지 않은 국가를) ‘기억’하겠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이면서. 이는 단순한 군사 지원 요청이 아니라, 중국과의 본격적인 패권 전쟁을 벌이기에 앞서 누가 우군이고, 적군인지를 가려내는 피아 식별 과정으로 봐야 합리적일 것이다.
한국은 오랫동안 안미경중(安美經中)이라는 틀 안에서 균형 외교를 지향해 왔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요동치는 국제 정세에서도 균형 외교론이 계속 설득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지금 한국은 더 이상 ‘균형’이라는 이름 뒤에 숨을 수 없는 시점에 와 있다. 이제는 줄타기가 아니라, 어느 편에 설 것인지 스스로 답해야 할 순간이다.
오윤희 국제부장 oyounhee@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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