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2026.03.30.

이용상 산업2부 차장
기업 경쟁력은 바짝 졸라맨
허리띠가 아닌 가야 할 방향
정하는 용기에서 나온다
1년2개월여 전 현대자동차그룹은 회사를 둘러싼 위기 요인과 기회 요인을 취합했다. 외부요인과 내부요인으로 구분한 뒤 2025년 신년회에서 임직원들이 볼 수 있게 대형 스크린에 큼지막하게 띄웠다. 여기엔 16개의 외부 위기 요인이 있었다. 지금 이 시점에 다시 하나하나 뜯어보자.
첫째,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 심화. 현대차그룹은 전통 완성차업체 가운데 가장 빠르게 전기차 투자를 확대한 기업으로 꼽힌다. 그러나 글로벌 전기차 전환 속도는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둘째, 구매력 약화. 지난해 한국의 실질소비는 0.4% 감소했다. 2020년 이후 5년 만에 마이너스 전환했다. 셋째, 보호무역 강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수입차에 고율 관세를 매기며 보호무역의 끝을 보여줬다. 유럽연합(EU)도 유럽 내 제조업 생산 확대를 골자로 하는 산업가속화법안(IAA)을 이달 초 발표했다. 둘 다 현대차그룹이 보호무역을 위기로 규정한 이후에 벌어진 일이다.
넷째, 미·중 갈등. 당초 이달 말 열릴 예정이던 미·중 정상회담이 연기됐다. 둘의 관계는 갈등을 넘어 요동을 치고 있다. 다섯째, 배터리 원자재 공급 부족은 해소되는 분위기다. 여섯째, 금융 리스크. 쭉 내려가는가 싶던 금리가 지지부진하더니 이젠 인플레이션 우려에 따른 인상 전망까지 나온다. 고금리는 소비자의 자동차 구매 부담을 키우기 때문에 완성차업체 입장에선 악재다. 일곱째, 국제 환경 정책 변화. 미국은 그렇다 치더라도 전 세계 친환경 정책을 가장 앞에서 이끌었던 EU마저 이럴 줄은 몰랐다. EU는 2035년 시행 예정이던 신규 내연기관차 판매금지 계획을 수정했다. 여덟째, 전기차 충전 인프라 부족. 한국은 비교적 충전 인프라가 잘 갖춰졌다고 평가받지만 전기차 보급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아홉째, 전기차 보조금 감소. 2021년 800만원이던 전기차 보조금 상한이 올해 580만원으로 줄었다.
열 번째, 배터리 가격 상승은 상당 부분 안정됐지만 중국산의 공급 과잉 영향이 크다. 외부 위기 요인이 해소됐다고 보긴 애매하다. 열한 번째, 국내 정치적 불안정성. 지난해 6월 조기 대선 후 정권이 바뀌었다. 분열과 양극화는 한국 정치의 고질병이 됐다. 열두 번째, 트럼프 2.0.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말하면 입만 아프니 다음으로 넘어가서 열세 번째, 수소차 불신. 장재훈 현대차그룹 부회장을 중심으로 경영진은 수소 생태계 구축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지만 충전 인프라 부족, 안전에 대한 불신 등은 여전하다. 수소 승용차는 아직 팔수록 손해인 구조여서 현대차 내부에서는 넥쏘를 너무 적극적으로 팔지 말라는 얘기도 나온다고 한다.
열네 번째, 경쟁사 간 협력 확대. 역시 현재 진행 중인 위기 요인이다. 열다섯 번째와 마지막 열여섯 번째는 글로벌 경쟁사 약진과 중국 전기차다. BYD(비야디)는 한국 시장 진출 첫해인 지난해 수입 전기차 ‘톱3’에 오르며 업계 예상보다 더 빠르게 안착했다. 이를 본 지커·샤오펑·립모터 등은 올해 한국 시장 출격을 앞두고 있다.
1년 전 위기 요인은 거의 다 그대로거나 오히려 커졌다. 위험한 고비나 시기를 ‘위기’라고 하는데, 이쯤 되면 “지금은 위기 상황”이라고 규정할 필요도 없다. 위기는 상수가 됐다. 기업의 경쟁력은 더 이상 졸라맨 허리띠나 버티는 힘에서 나오지 않는다. 필요한 건 가야 할 방향을 정하는 용기다. 지난 11일 현대차그룹은 9조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구체적으로 발표했다. 전북 새만금에 대규모 미래 신사업 클러스터를 조성한다는 내용이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수전해 플랜트, AI 수소 시티, 로봇 클러스터를 만든다. 현대차그룹의 이번 투자는 단순히 투자를 넘어 계속되는 위기 속에서 미래 경쟁력의 좌표를 찍은 결정이다. 경제학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저서 ‘안티프래질’에 “바람은 촛불을 끄지만 모닥불은 키운다”고 적었다. 위기 속에서 더 크게 타오를 것인지, 꺼질 것인지는 가야 할 방향을 정하는 용기에 달려 있다.
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
산업2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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