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2026.03.30.

김혜원 정치부 차장
일본 정치에서 세습은 낯선 문화가 아니다. 아버지 지역구를 자녀가 물려받는 정치 가문은 흔하고 유권자도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이는 일본 정치의 필수 3대 요소인 지반(조직), 간판(인지도), 가방(자금)이 대를 이어 축적되는 구조가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일본 첫 여성 총리인 다카이치 사나에처럼 비세습 정치인이 오히려 예외로 언급될 정도다.
한국에서도 혈연 중심의 정치 세습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특정 정치인의 자녀나 친인척이 지역구를 이어받을 때마다 ‘지역구 물려주기’라는 비판이 뒤따랐다. 다만 혈연에 의한 정치 대물림은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검증과 경쟁을 거친 공천 절차가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한국 정치에는 다른 방식의 세습이 관찰된다. 혈연이 아니라 정치적 지분과 영향력이 이어지는 ‘지분 세습’이다. 공천이 곧 당선을 의미하는 특정 정당 강세 지역에서는 공천이 경쟁의 결과가 아니라 배분의 대상이 됐다. 선거는 유권자가 후보를 선택하는 과정이라기보다 당 내부에서 누가 그 자리를 맡을지를 정하는 절차에 가까워졌다. 공천이 공정한 경쟁과 검증의 결과가 아니라 조정과 합의의 산물로 비치는 이유다.
최근 수도권을 중심으로 불거진 공천 잡음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재명 대통령 지역구였던 인천 계양을 보궐선거를 놓고는 후보 경쟁력이나 지역 기반보다 정치적 영향력이 작용하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인천시장 후보로 단수 공천된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지역구인 연수갑 역시 후속 공천을 둘러싸고 지분설이 끊이지 않는다. 이 같은 현상은 특정 정당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민주당이든 국민의힘이든 ‘텃밭’ 지역을 중심으로 유사한 패턴이 반복된다. 이런 지분 나눠먹기식 공천이 새롭거나 놀라운 것은 아니다. 제한된 시간 안에 경쟁력 있는 후보를 내세워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는 정치권의 설명도 일정 부분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번 6·3 지방선거는 양상이 다르다. 이재명정부 출범 이후 높은 국정 지지율과 거대 여당 체제 속에서 치러지는 첫 전국 단위 선거라는 구조적 배경 때문이다. 특히 이 대통령 지지율이 70%대에 육박하면서 여당 우세 구도가 굳어졌고 일부 지역에서는 본선보다 공천이 더 중요한 승부처가 됐다. 이길 수 있는 곳에 인물 배치를 우선하는 경향이 강화됐고 공천이 곧 권력 배분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한층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 셈이다.
공천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일부 지역에서는 후보 검증보다 차출과 인위적 배치가 먼저 거론되거나 특정 인사를 둘러싼 공천 논의가 과열되는 모습이 나타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기준과 절차가 흐려진다는 데 있다. ‘경쟁력’이라는 이름 아래 어떤 판단이 내려지는지, 그 기준이 누구를 향하는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보궐선거처럼 책임정치가 작동해야 할 자리에서도 ‘누가 배치될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는 장면을 유권자는 목도하고 있다. 대출 사기 혐의로 의원직 상실형을 확정받은 양문석 전 민주당 의원의 사고 지역구인 경기 안산갑 후보군을 둘러싼 당 안팎의 신경전도 하나의 사례다.
혈연이 아니라고 해서 세습이 아닌 것은 아니다. 정치적 기반과 기회가 특정 집단 안에서 반복된다면 그것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세습이다. 문제는 세습의 방식이 아니라 그 결과다. 선거를 형식적 절차로 만들고 유권자의 선택이 제약받는 선거가 되풀이된다면 그 정치가 과연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김혜원 정치부 차장(kim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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