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 Column

광화문 현판은 그냥 두라

dalmasian 2026. 4. 24. 23:33

2026.04.23.
‘쌍현판’ 속도 내는 문체부
절충안 아닌 현판 원형 훼손
광화문이 국가 상징이라면
정권 따라 쉽게 바꿔선 안돼


현재의 광화문 현판 아래에 훈민정음체 한글 현판을 추가한 가상의 모습. /광화문 훈민정음체 현판설치 국민모임

서울 광화문 앞이 또 소란하다. 지난 1월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광화문 한글 현판 추가 설치 검토안’을 이재명 대통령에게 보고하면서부터다. 지금 있는 한자 현판 아래 한글 현판을 추가한다는 이른바 ‘쌍현판’ 아이디어. 장관은 “외국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에 한글 현판을 부착하면 한글의 우수성을 알릴 수 있다”고 했다.

발언 시점과 주체가 고개를 갸웃하게 했다. 검은색 바탕에 금빛 글씨로 쓴 새 현판이 걸린 게 불과 3년 전이다. 광화문 현판 복원을 담당하는 주무 부처는 문체부가 아니라 국가유산청이다. 그런데도 문체부는 한글날 제정 100주년을 맞는 올해 한글날에 설치를 완료하겠다며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달 말 찬반 토론회를 개최했고, 대국민 설문조사를 진행한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고종 때 중건된 광화문은 수난의 연속이었다. 일제에 의해 옮겨졌고, 6·25 때 불타며 현판도 전소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원래 위치에 재건하면서 친필 한글 현판을 달았으나, 노무현 정부 때 ‘박정희 흔적 지우기’ 논란 속에 철거됐다. 2010년 ‘고종 때 중건 당시’를 기준으로 한자 현판이 복원됐지만, 석 달 만에 균열이 생겼다. 이때 한글 단체를 중심으로 “한글 현판을 달자”는 주장이 나왔다. 한자냐 한글이냐, 누구의 글씨를 쓸 것이냐, 숱한 논란이 이어졌다.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은 수차례 문화재위원회 심의 끝에 ‘1865년 임태영 글씨’라는 기존 방침을 재확인했다. 그 과정에서 흰 바탕에 검은 글씨가 아니라 검은 바탕에 금색 글씨였다는 오류도 바로잡았다. 지금의 현판이 걸리는 데 13년이나 걸린 이유다.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원칙이 있었다. ‘문화유산=원형 복원’이라는 큰 틀과 ‘고종 때 중건’이라는 복원 시점이 명확했다. 당시 주무 부처인 문화재청이 이미 대국민 토론회, 설문조사, 전문가 집단의 의사 결정 과정을 거쳐 결론을 낸 사안이다. 13년간 이어진 혼란을 수습하고 새 현판 복원 기념식을 열며 환영한 게 3년 전이다. 결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정부가 그간 내세운 문화유산 복원의 근본 철학을 내던질 것인가.

최휘영 장관은 “한글 현판을 추가하면 문화재 원형을 지키려는 정신에 더해 한글이라는 시대적 요구도 포용할 수 있다”고 했다. 얼핏 합리적인 ‘절충안’처럼 들린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현판 추가는 원형 훼손이라고 반박한다. 지난달 토론회에서 이강민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한자 현판 아래 한글 현판을 덧붙이는 것은 발음 기호 표기에 불과하며, 오히려 한글의 주체적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문제는 국가유산청의 애매한 태도다. 윤석열 정부 시절인 2024년 유인촌 문체부 장관도 한글 현판을 제안한 적이 있었다. 당시 국가유산청장이 문화유산 복원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반대해 무산됐다. 그러나 이번 국무회의에서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쌍현판 설치에) 저희도 적극 지원할 생각”이라고 맞장구쳤다. 노무현 땐 박정희 ‘친필’을 문제 삼더니, 이제 와선 한자를 트집 잡아 바꾸겠다는 건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현판을 갈아치운다면, 문화유산의 역사성과 신뢰가 뿌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한글은 더없이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우리 글자다. 하지만 그 우수성을 알리는 방법이 반드시 광화문 현판을 바꾸는 것이어야 할까. 광화문을 국가의 자존심이자 상징으로 여긴다면, 그 얼굴을 정권 따라 쉽게 바꾸면 더더욱 안 된다. 광화문 현판을 정치 논쟁에 끌어들이지 말자. 3년 전 합의를 뒤엎는 ‘쌍현판’ 논의는 정부가 쌓아온 국가유산 복원의 원칙과 철학을 무너뜨리는 자충수가 될 뿐이다.

허윤희 기자 ostinat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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