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 글, 김진안)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AI 서밋' 현장에서 찍힌 한 장의 기념사진이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삼성전자와 미국 브로드컴 간의 2,000억 달러 규모 전략적 업무협약(MOU) 체결식, 스포트라이트 중심에서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는 이재명 대통령의 모습이다.
방위산업의 잠수함 수출이나 정부 조달 사업처럼 국가 보증과 외교력이 절대적인 영역이라면 대통령의 참석이 다소 이해가 간다. 그러나 삼성전자와 브로드컴은 엄연한 사기업이다. 기업 생리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이 어색한 연출에 실소를 금치 못했을 것이다. 본래 반도체 산업에서 B2B 공급 계약이나 파트너십 체결은 철저한 보안 속에서 조용히 이루어진다. 수조 원대 진짜 계약이 오갈 때조차 그룹 회장이 전면에 서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 해당 사업부장(사장)선에서 조용히 도장을 찍고, 묵묵히 실적으로 말하는 것이 이 동네의 오랜 관례이자 상식이다.
하물며 이번 행사는 강제성이나 법적 구속력이 없는 양해각서(MOU) 자리가 아닌가. 시장 상황, 수율, 단가, 기술 경쟁력 향배에 따라 언제든 조건이 바뀌거나 무산될 수 있는 불확실한 서약이다. 사기업 간의 정식 수주 본계약도 아닌 MOU 자리에 국가 정상이 가운데 서서, 마치 정상 외교의 힘으로 일군 전대미문의 치적인 양 포장하는 모습은 생뚱맞고 촌스럽기까지 하다.
사실 반도체 산업의 비즈니스 구조상, 사기업 간 수십·수백조 원의 자본과 기술이 오가는 거대 프로젝트는 프로세스가 매우 길고 막대한 투자가 동반된다. 워낙 민감하고 기밀에 속하는 영역이라 대외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내부적으로는 이미 양사 간에 상당 수준까지 단계별 계약이나 실질적인 정식 계약 수순을 체결해 두고 추진하고 있었을 것이다. 정식 계약에 준하는 구체적인 실무 약정 없이는 이런 대형 프로젝트를 첫발조차 떼지 못하는 것이 냉정한 시장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MOU 정도로 추진될 수 있는 사업이 절대 아니다.
그렇기에 이미 진행되고 있던 민간 프로젝트를 갑자기 외교 무대 한가운데로 끌어와 대통령을 병풍처럼 세우고 공개 MOU 체결식을 연출한 것 자체가 실소를 자아낸다. 미국 측 파트너인 브로드컴 관계자들이 속으로 무엇이라 생각하며 비웃고 있을지 상상만 해도 민망하다. 이런류의 생색내기용 MOU 체결을 직접 겪어본 실무자라면 그 속내와 연출의 허구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내용의 본질을 파헤쳐 봐도 정치권의 '숟가락 얹기'는 선을 넘었다. 삼성전자가 브로드컴을 매개로 구글 TPU(텐서처리장치) 물량을 메모리부터 파운드리까지 턴키로 수주하려는 움직임은 결코 어느 날 갑자기 정부 외교 성과로 떨어진 벼락 행운이 아니다.
이미 업계와 언론을 통해 오래 전부터 구체적인 분석 보도가 이어졌던 사안이다. 구글이 미디어텍과 협력해 개발 중인 10세대 TPU(코드명 '아이스피시')는 2028년 양산을 목표로 추진되고 있다. 폭증하는 AI 수요로 TSMC의 패키징 병목 현상이 심화되자, 구글은 메인 프로세서(컴퓨트 다이)는 TSMC에 맡기더라도 핵심 부품인 '메모리 I/O 다이'를 삼성전자 파운드리의 2나노 공정으로 생산하고, HBM 공급 및 첨단 패키징까지 묶는 실질적 '턴키(Turn-key) 솔루션' 협상을 오랫동안 진행해 왔다.
즉, 오래 전부터 기술 엔지니어들과 영업진이 현장에서 피와 땀을 흘리며 TSMC의 독점 체제를 뚫기 위해 정교하게 짜온 전략적 결실인 것이다. 지금 양사는 2028년 양산을 목표로 칩 설계와 공정 테스트라는 지루하고 혹독한 기술 검증 과정을 거치는 중이다.
기술과 비즈니스의 결실은 오롯이 기업과 엔지니어의 몫이어야 한다. 치열한 야전에서 피 흘려 싸운 것은 기업인데, 생색은 대통령이 내고 숟가락을 얹는 구태가 2026년 AI 시대 한복판에서도 변함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미시적인 기술 격차를 극복하기 위해 밤을 지새우는 현장 인력들의 노고를 정치적 치적극의 소품으로 전락시키는 일은 이제 그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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