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2026.04.01.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

어떤 생각은 예고 없이 떠오른다. 누군가는 운전 중에 노래를 들으며, 누군가는 잠들기 전 정적 속에서. 나의 경우, 그 성소(聖所)는 자욱한 수증기가 서린 욕실이다. 쏟아지는 물줄기에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고 삶이 덧씌운 허울을 벗어내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나를 만난다.
거울 앞에서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몸을 보니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 이렇게 살집이 붙었는지, 옆구리에 군살이 잡힌다. 거북목과 굽은 등도 눈에 거슬린다. 냉소적인 시선이 결점을 찾아 여기저기 몸을 훑던 차였다. 마치 그만하라는 듯, 어린 나를 양팔로 끌어안던 어머니의 품이 느껴졌다. 그러곤 볼품없다 타박했던 몸에서 생경한 경외감이 뿜어져 나왔다.
매끄럽게 이어지는 곡선과 단단한 골격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 몸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요새와 같은 당신 몸 안에서 나의 심장을 조심스럽게 빚었다. 뒤이어 나의 척추를 한마디씩 세우고, 열두 쌍의 갈비뼈를 만들고 팔다리 사이에 관절을 맞췄다. 근육을 전신에 채우고 촘촘하게 혈관을 잇고 그 위에 보드라운 피부를 감쌌다.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당신의 보살핌을 대신해줄 폐와 췌장과 콩팥도 빚었다. 나의 눈, 귀, 코, 성대, 잇몸, 머리카락, 손가락 끝에 돋아난 손톱까지 어디 하나 어머니의 정성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어머니는 우주에서 가장 정교한 창조자가 되어 불과 열 달 만에 내가 평생 입고 살아갈 단 한 벌의 몸을 완벽하게 지어냈다.
거울에 서린 김을 닦았다. 맑아진 거울에 비치는 눈매와 어깨선이 어머니를 쏙 빼닮았다. 몰랐다. 그동안 무심결에 함부로 대했던 이 몸이, 실은 당신 숨결로 내 심장이 박동하던 순간부터 준비한 사랑의 완벽한 형상이었음을. 어머니가 지어준 한 벌의 몸속에 지극한 사랑과 정성이 가득하다. 이제야 나는 내 몸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느끼고 보고 만진다. 아름답고 숭고하다.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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