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이인아 기자 2026.04.10.
석유 최고가격제가 시행된 지 한 달 차, 겉으로 보이는 수치는 안정세다. 실제 국내 기름값은 유럽 등 다른 나라와 비교해 상승 폭이 작았다. 중동 전쟁 발발 후 한 달간 유럽의 자동차용 경유 가격이 32% 오를 동안 한국은 8% 상승에 그쳤다. 시행 일주일 만에 휘발유 평균 가격이 전주 대비 72.3원 떨어지는 등 가격 안정 효과도 즉각 나타났다.
하지만 현장의 분위기는 냉랭하다. 겉으로는 가격이 잡힌 듯 보이지만, 이면에는 ‘누가 비용을 감당할 것인가’를 둘러싼 셈법이 엉켜 있어서다. 한 에너지 전문가는 “제도가 종료되면 정부와 정유사가 손실액 정산 과정에서 치열하게 다툴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유사 입장에서 이번 사태는 그야말로 ‘대목’을 놓친 격이다. 미국이 이란을 공격하기 전 싼값에 사들인 원유를 이용해 석유 제품을 만들어 비싼 가격에 팔 수도 있었다. 국제 시세에 따라 막대한 이익을 거둘 수 있었으나, 정부 방침에 따라 수출을 줄이고 내수를 유지하며 ‘잠재적 이익’을 포기한 셈이다.
그렇다고 정유사가 손해를 봤다고 보기도 어렵다. 더 벌 수 있었던 돈을 덜 벌게 된 것에 가깝다. 저가에 확보해둔 재고 물량으로 현재도 상당한 이익을 거두고 있다. 한 정유업계 관계자는 “국가 위기 상황이니 고통 분담 차원에서 정부에 협조하고 있으나, 국제 시세로 팔면 훨씬 더 돈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정부는 이번 추가경정예산(추경)에 석유 최고 가격제에 따른 정유사 손실 보전용으로 5조원을 편성했다. 이를 두고 정유사의 기회비용을 국민 세금으로 메워주는 게 타당하냐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영업 손실이 발생하지 않았고, 오히려 돈을 꽤 벌고 있는 상황이어서다. 기회비용도 따지고 보면, 정유업계 눈높이를 맞추느라 발생한 차액이다.
유류비 지원 혜택이 고소득층에 쏠리는 ‘복지의 역진성’ 문제도 뼈아픈 부분이다. 휘발유는 주로 승용차 운행에 사용되며, 고소득층일수록 연료 소비량이 많다. 서민 물가 안정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세금을 투입해 자차를 많이 굴리는 계층의 기름값을 대신 내주는 셈이다.
문제는 앞으로다. 지금은 저렴하게 사 온 재고로 버티고 있지만, 조만간 비싼 값에 산 원유가 들어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사오는 원유 가격은 올랐는데, 국내 가격만 묶어둔다면, 정유사는 내수에서 판매할 요인이 없어진다. 2021년 헝가리에서도 석유 가격 상한제를 시행했다가 정유사가 더는 기름을 공급하지 않아 주유소마다 기름이 동나는 ‘석유 대란’이 벌어졌다.
석유 최고 가격제는 고통을 잠시 미루는 진통제일 뿐이다. 가격 억제 효과에 안도할 때가 아니라, 시장 원리로 복귀하기 위한 정교한 ‘출구 전략’이 절실하다. 모두에게 세금을 뿌리기보다 에너지 취약 계층, 물류 업계에 혜택을 지원을 집중하는 방향으로 틀어야 한다. 시장 왜곡이 심해지기 전에 영리한 판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인아 기자 inah@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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