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2026.04.29.

이수민 극작가
가자지구에서 죽은수백명의
언론인과 이들이 목숨으로
남긴 피묻은 기록의 의미
필리핀 기자 패트리시아 에방헬리스타는 호텔방에서 암살자를 기다렸다. 그가 화장실로 들어가자 에방헬리스타가 카메라맨에게 말했다. 인터뷰 전에 무기 소지 여부부터 확인해야 한다고. 하지만 카메라맨이 되물었다. “총을 찾아내면 어떻게 되는 거죠?” 기자와 카메라맨 모두 그 시나리오에는 대비하지 못했다. 전날 회의실에서 인터뷰의 위험을 따져보긴 했어도 총을 찾은 이후 상황까지는 논의하지 않았다.
암살자는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의 ‘마약과의 전쟁’에 동원된 ‘자경단’이었다. 그는 표적에 적힌 마약 사용자와 밀매업자, 도둑, 바람피운 남편 등을 ‘처단’했고, 시체 한 구당 사례금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마약 중독자는 죽어 마땅하다는 대통령의 연설에 수긍하며 그가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죽어야 합니다.” 에방헬리스타는 그 말을 자신의 책 제목으로 정했다. 그녀의 책에는 2016년부터 6년간의 ‘마약과의 전쟁’ 취재기가 담겨 있다.
두테르테는 흉포한 마약사범들이 체포에 저항하다 사살되었다는 주장을 반복했다. 시신 옆에는 즉결 처형을 합리화하려는 듯 ‘마약왕’이라고 적힌 팻말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취재 결과 재판 없이 사살된 피해자 다수는 체포에 순응했고 무기를 소지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자경단원은 ‘실수로’ 어린아이를 쏘았고, 표적과 같은 색 셔츠를 입은 남자를 죽였음을 시인했다. 마지막 기사를 내보내기로 한 날 에방헬리스타는 국외로 피신했다. 필리핀에서는 2022년과 2023년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라디오 진행자들이 피습됐고, 2009년 마긴다나오 주지사 선거를 취재하던 언론인 32명이 차량 테러로 목숨을 잃은 바 있다. 그녀도 숱한 살해 협박과 강간 위협에 시달렸다. 필리핀 언론과 시민사회의 노력은 결실로 이어졌다. 2021년 국제형사재판소(ICC)는 두테르테 조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지난 4월 23일, ICC는 반인도 범죄 혐의를 인정해 그를 재판에 회부한다고 밝혔다. ‘마약과의 전쟁’으로 사망한 피해자 수는 1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ICC의 제동이 없었다면 ‘죽어 마땅한’ 시민들의 처형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두테르테 정권의 약식 처형은 이스라엘의 ‘테러범 사형법’을 연상시킨다. 지난 3월 이스라엘 국회가 통과시킨 법은 서안에서 테러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팔레스타인인의 신속한 처형을 가능하게 한다. 현재 서안은 교전 지역이지만 법은 팔레스타인인만 겨냥한다. 팔레스타인인을 살해한 이스라엘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국제앰네스티는 ‘팔레스타인인 처형의 전권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면서 공정한 재판을 위한 기본 안전장치마저 박탈했다’고 이스라엘을 강하게 비판했다.
ICC는 2024년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체포영장도 발부했다. 필리핀 언론의 사례처럼 네타냐후에게 전쟁 범죄 및 반인도 범죄 혐의가 적용된 데는 가자지구 언론인들의 취재가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을 알린 대가는 가혹했다. 국경없는기자회(RSF)는 2023년부터 가자지구에서 220명 넘는 언론인이 이스라엘군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정했다. 이란 전쟁 발발과 함께 전장이 확대되면서 이스라엘군의 총칼은 이제 레바논 기자들을 겨냥한다. 지난 22일, 종군기자 아말 칼릴이 취재 도중 목숨을 잃었다. 이스라엘군은 구급대원을 향해 발포하고 구급차가 오지 못하게 도로를 공습했다. RSF에 따르면 칼릴은 2024년 이미 협박을 받았다. 누군가 이스라엘 번호로 전화를 걸어 위협했다. “당신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때가 되면 찾아가겠다.” 언론인을 죽음으로 내몰면 범죄의 역사도 함께 묻힌다고 믿는 자들이 있다. 하지만 불굴의 기자 정신이 두테르테의 폭압을 멈춰 세웠듯 가자지구와 레바논 기자들의 피 묻은 기록 역시 언젠가는 전쟁 범죄 가해자들을 처벌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이수민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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