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 Column

민원의 품격

dalmasian 2026. 4. 29. 07:43

[내일을 열며] 2026.04.29.

      김상기 디지털뉴스부 선임기자

평소 즐겨보던 한 유튜버의 영상이 최근 온라인에서 화제가 됐다. 자신을 ‘유튜브계의 필수 소비재’라 부르며 공장 노동자의 애환을 전해온 유튜버인데, 그는 요즘 엉뚱한 민원에 시달리고 있다고 호소했다. 민원 내용은 단순했다. 일을 너무 많이 했고, 또 공장에서 밥을 먹었다는 이유였다. 야근을 마치고 공장 한쪽에서 삼겹살을 굽거나 라면을 끓이며 주70시간을 일해 힘들다고 했더니 누군가 주52시간 상한제와 공장 취식 금지 규정을 어겼다며 반복적으로 신고를 넣었다는 것이다. 그는 5인 미만 사업장이라 해당 규정이 적용되지 않고, 작업환경 기준도 충족해 현장 취식 역시 문제없다고 설명했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구독자와 즐거운 ‘먹방’을 나누던 자리가 심기 불편한 누군가의 민원 때문에 감시의 공간이 돼버렸다. 사실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우리는 이미 ‘민원 공화국’에 살고 있다. 이 표현이 과장이 아님을 수치가 보여준다. 지난해 6월부터 12월까지 국민신문고에 접수된 민원은 무려 662만건이다. 이 가운데 30만건을 단 91명이 제기했다고 한다. 소수의 악성 민원으로 행정력이 소모되고 정작 필요한 곳에 쓰여야 할 에너지가 엉뚱한 곳에서 낭비됐다.

문제는 이런 악성 민원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는커녕 공동체의 안전과 일상을 해칠 수 있다는 데 있다. 얼마 전 경기도 수원의 한 119안전센터는 출동 사이렌이 시끄럽다는 이웃 아파트 주민들의 민원에 시달렸다. 119안전센터는 결국 긴급 출동이 아닌 경우 사이렌 소리를 줄이거나 아파트 단지를 벗어난 이후 사이렌을 켜겠다며 민원을 일부 수용했다고 한다.

학교도 쏟아지는 악성 민원에 만신창이가 된 지 오래다. 운동회는 시끄럽다는 주민들의 민원에 마이크를 끄고 진행되거나 아예 사라지고 있다. 학생 안전을 위해 어린이보호구역을 넓히려다 ‘주차가 불편하다’는 주민 민원에 무산되기도 한다. 현장의 교사들도 수업보다 민원 대응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며 아우성이다. 수업 중 떠든 아이를 잠시 세워두었다고 “우리 애 기를 죽였다”는 학부모의 신고에 시달리기 일쑤다. 교실조차 일촉즉발의 민원 전쟁터가 된 느낌이다.

민원은 시민의 권리를 지키는 훌륭한 수단이다. 그러나 지금의 민원은 종종 ‘떼쓰기’에 가까운 게 현실이다. 내 작은 불편함 때문에 타인의 존엄이나 통념상 지켜지던 규칙이 짓밟히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더 큰 문제는 이 이기심을 규제할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데 있다. 민원이 상식 범주에 있는지 따지기 전에 일단 접수됐으면 처리돼야 한다. 그 과정에서 현장은 지치고 위축된다.

이런 악순환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밖에 없다. 사이렌을 늦게 울린 구급차의 목적지가 내 집이 아닐 거라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호랑이 선생님’이 사라진 교실에서 아이들이 과연 올바른 것을 배울 수 있을까. 반복되는 민원에 시달린 사람들이 점점 소극적으로 변하는 사회는 언제까지 건강할 수 있을까. 민원이 많을수록 사회는 더 안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모두가 눈치를 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이상한 사회가 될 뿐이다. 민원은 보호하되 남용은 제어해야 한다. 반복적이고 악의적인 민원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제재 장치가 마련되면 좋겠다. 현장을 신뢰하지 못하고 민원 처리에만 급급한 행정도 바뀌어야 한다. 모든 민원을 똑같이 다루는 건 공정이 아니라 무책임이다. 민원은 필요하지만 절제가 없는 민원은 폭력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민원의 양이 아니라 민원의 품격이다.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
디지털뉴스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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