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 Column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dalmasian 2026. 4. 29. 07:45

[강영안 교수의 질문하는 삶]
2026.04.28.

여러분, 평안하신지요. 부활의 기쁨을 지나 이제 우리는 성령 강림을 기다리는 순례의 길 위에 있습니다. 오늘은 부활한 주님이 베드로에게 던진 질문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파고드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세우고 또 스스로 무너지는지를 드러내며 그 무너짐의 파편 위에서 어떻게 다시 일어서는지를 보여주는 신학적 사건입니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힘은 성취의 강박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불안 속에 삽니다. 지위와 성과, 타인의 인정이 곧 나라고 믿습니다. 이 구조 속에서 타인은 함께 사는 이웃이 아닌 내 성공을 확인해 줄 배경이나 나를 위협하는 경쟁자가 됩니다. 결국 인간은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처럼, 반복되는 증명의 굴레 속에 갇히고 맙니다.

베드로 역시 이 굴레 안에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너무 잘 안다고 자부했습니다. 모두가 주님을 떠나도 자신만은 남으리라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뼈아픈 실패는 그의 자기 이해를 산산이 부쉈습니다. 그는 자신이 믿었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실패는 위선적인 거짓 자아를 해체하는 은총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스스로 쌓아 올린 자아가 무너진 자리에 있는 그대로의 내가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 자체가 사람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중요한 건 자책하며 숨어 들어간 베드로를 주님이 먼저 찾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그의 과거를 삭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 번의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실패를 정면으로 통과하게 합니다. 이제 그 기억은 정죄의 근거가 아닌 새로운 관계 안에서 다시 해석됩니다. 은혜는 과거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의미를 변화시킵니다.

여기서 용서의 본질을 봅니다. 용서는 잘못을 잊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사랑이 빠져나간 자리의 공허라면, 용서는 이 빈자리를 다시 채우는 따뜻한 현존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은 황량해진 베드로의 내면에 사랑을 다시 불러오는 초대였습니다. 주님은 이 질문으로 베드로가 여전히 사랑받는 존재이며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 존재임을 확증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베드로의 대답은 이제 이전과 다릅니다. “주님,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는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지 않습니다. 자기 확신의 언어를 버리고 자신을 ‘타자의 앎’에 온전히 맡깁니다. 스스로를 지탱하려던 고집을 내려놓고 자신을 아는 주님의 사랑 안에 존재를 놓아둡니다. 이것이 존재의 근본적 전환입니다. 이제 인간은 증명해야 할 존재가 아닌 나를 아는 분께 맡겨진 존재로서 살아갈 자유를 얻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소크라테스의 질문과 결이 다릅니다. 소크라테스가 ‘정의란 무엇인가’ ‘용기가 무엇인가” 물으며 결국 물은 것은 “너는 아는가”였습니다. 이 물음으로 소크라테스가 인식의 정화와 무지의 자각을 추구했다면,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면서 존재의 회복과 관계의 회복을 가져왔습니다. 소크라테스 앞에서 우리는 무지를 고백하지만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주님이 아십니다”라며 사랑을 고백하고 삶을 의탁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내 양을 먹이라.” 이는 삶의 방식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더는 나를 증명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필요에 응답하며 살라는 부르심입니다. 환대와 돌봄,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의 연대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완벽해서 돕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았기에 돌보는 존재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우리를 증명의 지옥에서 꺼내 사랑의 잔치로 불러내는 초대입니다. 이 질문에 정직하게 응답할 때 우리의 삶은 반복되는 고립이 아니라 눈부신 사랑의 시작으로 바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의 삶에 이 사랑이 깃들기를 빕니다.

한동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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