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를] 2026.04.29.
| 신유진 작가
물건을 구매하고 배송지에 주소를 적는다. 주문 완료 버튼을 누르는 순간, 필수 기재 항목을 다 채우지 않았다는 메시지가 뜬다. 상세 주소란이 문제다. 우리 집은 마을 이름과 번지수가 전부인데, 그 빈칸에 뭘 더 써야 할지 모르겠다. 한참 고민하다가 이렇게 적었다.
‘파란 창고와 푸른 잎이 올라오기 시작한 대추나무가 있는 집.’
제법 마음에 드는 상세 주소가 됐다.
내가 사는 동네는 위치를 설명하기 쉽지 않다. 표식이 될 만한 건물이나 눈에 들어오는 간판이 없고, 복잡한 골목들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이런 곳에서 길을 잃었다면, 스마트폰의 길 찾기 앱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것은 위도와 경도 대신 감각과 서사를 기준으로 삼는 일종의 입말 지도다. ‘모과나무가 있고 검은 개가 사는 집 뒤쪽’ ‘밥 짓는 냄새가 구수하게 나는 집에서 우측으로 꺾기’ 같은 안내들. 지금 살고 있는 집에 처음 방문한 날도 동네 아주머니의 그 지도가 나를 안내했다. 벚꽃이 만발한 둑길 아래 마을의 끝이자 시작인 곳에 있는 파란 창고 집. 그 지도가 없었다면 이 집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
내비게이션이 등장한 이후로 세계는 점과 선으로 단순해졌다. 우리는 목적지라는 ‘점’을 향해 가장 빠른 ‘선’을 골라 질주한다. 그 직선 위에서 길 양옆의 풍경들, 선을 벗어난 세계는 모두 괄호 속에 묶인 채 사라진다.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세상에서 목적과 상관없는 풍경이나 정취는 도착을 방해하는 장애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괄호 안에 넣어버린 것들이야말로 사실 우리를 이곳에 발붙이게 하는 살아있음의 증거가 아닌가. 밥 짓는 냄새가 담장을 넘어 골목의 공기를 바꾸는 범위, 대추나무의 그림자가 마당에 그려내는 느릿한 궤적, 검은 개의 짖는 소리가 도달하는 거리. 효율의 선 위에서라면 무의미했을 이 모든 조각이 모여 비로소 하나의 온전한 삶의 영역을 이룬다.
그러니 괄호 안의 세계를 우리의 삶에 다시 불러들이는 일은 점과 선이 아니라 면을 그리며 사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목적지로 빠르게 이동하는 기능적 존재가 되기를 거부하고, 그 길 위에 놓인 모든 장소를 내 삶의 영토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일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안식은 목적지에 도착하는 그 찰나가 아니라, 그곳에 닿기까지 우리가 온몸으로 통과해 온 ‘면’들 사이에 숨어 있지 않을까. 가장 일상적인 풍경을 읽고 음미하며 평범하고도 무사한 하루임을 안도하는 일, 그런 사소한 면적들이 겹겹이 쌓여 우리의 생(生)은 비로소 입체적인 부피를 갖게 된다.
인생이라는 지도도 직선을 고집해야 할 이유는 없다. 때로는 길을 잃고 미로 같은 골목을 헤매지만, 그조차 나만의 면을 넓혀가는 경로임을 안다면 기꺼이 즐거운 산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선 밖으로 밀려난 것들을 다시 불러 모으고, 괄호 속에 묶여 있던 감각들을 하나둘 꺼내 텅 빈 공백을 채워 본다. 효율의 눈에는 실패로 보였을 우회로와 무용해 보였던 숱한 방황들이 실은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내 삶의 가장 고유한 상세 주소가 된다는 것을 안다. 무엇이 나를 찾아와 줄까. 기대하는 만남을 향해 지금 이 삶의 주소를 건네 본다.

신유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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