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05.
‘前 정권 사업’ 재치있게 치하한
루스벨트의 후버댐 준공 연설
한국 정치는 전임자 지우기 바빠
나라 앞에 여야 없는 모습 보고파

지난달 25일 미국 네바다주의 후버 댐이 독립 250주년을 맞아 성조기의 붉은색, 푸른색과 흰 별을 나타내는 조명으로 장식됐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1930년대 대공황기의 상징인 후버 댐을 “미국을 대표하는 공학적 성취”로 내세우며 독립기념일인 7월 4일까지 특별 기념 공간으로 운영하기로 했다. /미국 내무부 페이스북
1935년 9월 30일 미국 네바다주 볼더 댐 준공식에 참석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렇게 연설했다. “왔노라, 보았노라, 압도당했노라(I came, I saw, and I was conquered).” 카이사르의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를 살짝 비틀어 거대한 댐의 위용을 표현한 언변이 돋보이지만, 이 장면은 어쩐지 어색해 보이기도 한다. 댐 건설을 추진한 인물은 루스벨트의 전임자인 허버트 후버였다. 훗날 바뀐 이름도 후버 댐이었다. 민주당 대통령인 루스벨트가 공화당 전 정권이 주도한 프로젝트를 ‘압도당했다’는 표현까지 써 가며 치켜세운 것이다.
루스벨트와 후버는 사적으로도 냉랭한 관계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루스벨트는 이 프로젝트를 깎아내리지 않고 국가적 의미를 강조했다. “미국 국민은 볼더 댐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편협한 소수를 제외하면 대서양 연안, 중서부와 북서부, 그리고 남부 어디에 살든 이 프로젝트가 완성됨으로써 얻게 될 국가적 이익이 48주 전체에 미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와이와 알래스카가 아직 주(州)로 편입되기 전, 당시 미국 국기의 별은 48개였다.
올해 독립 250주년을 맞은 미국이 이 댐을 캔버스 삼아 성조기 조명 쇼를 펼치는 건 댐이 크고 아름다워서만은 아니다. 대공황 극복 의지의 상징인 후버 댐은 통합의 정신을 기리는 기념비이기도 하다.
루스벨트도 정치인이니 초당적 이미지가 유리하다는 계산이 물론 있었을 것이다. 중요한 건 말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사 주간지 타임은 1934년 ‘올해의 인물’로 루스벨트를 선정하면서 “극소수의 편협한 당파주의자만이 이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해 중간선거에서 집권당의 현직 대통령으로서 거둔 이례적 승리도, 대공황과 2차 대전이라는 위기를 극복하고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이끈 지도자라는 역사적 평가도 지지 세력만 바라봤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그가 미국 역사상 유일한 4선(選)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넓은 아량이야말로 강력한 전략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한국에서 전 정권의 역점 사업은 대개 청산 대상이 된다. 이명박 정부에서 시작한 4대강 프로젝트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감사 대상이 됐다. 정권에 따라 결과가 엇갈렸다. 지난해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윤석열 정부에서 추진한 ‘기후 대응 댐’ 신규 후보지 14곳 중 7곳에 대해 추진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수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데 여야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거기에 대한 접근법이 정권에 따라 이처럼 크게 달라질 수 있는지 의문이다.
한국 정치인들도 물론 말끝마다 국민을 외친다. 그런데 누가 국민인가?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과 조선일보가 지난달 304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 51%가 ‘나를 대표하는 정당이 없다’고 답했다. 국민을 위한다는 정치 앞에서 국민 절반 이상이 소외감을 느낀다. 국민이 ‘우리 편’의 다른 이름으로 오용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유구한 당쟁의 역사를 갖고 있다. 조선 왕조의 몰락이 오직 당쟁 때문이었다고 할 수는 없어도 당쟁에 매몰돼 세상의 변화에 뒤처진 것이 중대 원인이었음은 분명하다. 서구 열강이 세력을 다투고 일본이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던 그때처럼 지금의 국제 질서도 급변하고 있다. 그런데 나라 밖에서 밀려오는 파도 앞에서 여야가 머리를 맞댔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나라 앞에 여야 없는’ 모습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기에 우리는 ‘여야 앞에 나라 없는’ 현실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채민기 기자 chaeplin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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