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 Column

존중받지 못한 숙의

dalmasian 2026. 7. 21. 07:26

[돋을새김]  2026.07.21.

               권기석 사회부장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확증편향의 시대에 상식 있는 시민들이 충분한 정보와 토론을 통해 합의점을 찾는 ‘숙의’는 대의민주주의의 단점을 보완할 매력적인 절차다. 다만 여러 사람의 시간과 참여가 필요한 데다 비용도 만만치 않아 모든 현안을 다 숙의로 해결할 수는 없다. 이런 가운데 ‘촉법소년’으로 불리는 형사미성년자의 연령 기준을 낮추는 문제에서 정부가 숙의를 시도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촉법소년 연령 문제를 다루는 숙의에서 민간 및 정부 위원 17명으로 구성된 사회적 대화 협의체는 지난 3~4월 16차례 전체회의와 분과위원회 회의를 개최하고 전문가 의견을 들었다. 시민참여단 212명도 충북 오송과 서울에서 하루 8시간씩 전문가들과 함께 학습하고 토의하면서 이 문제에 관해 깊이 생각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도출한 결론이 ‘조건부 하향’이다. 강력·중대·반복 범죄에 한해 현재 만 14세인 촉법소년 기준을 만 13세로 낮추자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지난 14일 국무회의에서 반려당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전 세계적으로 12세로 하는 경우도 많지 않나. 너무 미약하지 않나”라며 추가 토론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한마디에 숙의 결과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돌이켜보면 촉법소년 연령 하향 문제를 놓고 정부는 계속 갈팡질팡했다. 지난 4월 말 처음 알려진 사회적 대화 협의체의 결론은 현 14세 기준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사회적 대화 협의체 논의를 주도한 성평등가족부는 이때 “최종 권고안은 수정·보완을 거치고 있다. 5월 중순 국무회의를 거쳐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국무회의 보고 일정은 6월 말에 잡혔고 이마저도 한 차례 취소됐다. 예정보다 두 달이 지난 이달 14일이 돼서야 국무회의에 ‘조건부 하향’이 보고됐다. 일이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은 것은 사회적 대화 협의체의 결론에 관한 정부 내 시각차 탓으로 보인다. 기준 연령의 전면적 하향과 일부 하향 의견이 맞섰던 것 같다. 특히 날로 심각해지는 청소년 범죄의 처벌을 위해 연령 하향이 필요하다는 이 대통령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숙의를 통한 결론이 이렇게 쉽게 무시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사회적 대화 협의체의 권고문을 보면 시민참여단은 숙의 토론 이후 촉법소년 연령 하향에 대한 태도가 상당 부분 바뀌었다. 숙의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상태의 기초조사에서 88.6%가 연령 하향에 찬성하고 4.9%가 반대했으나 숙의 토론 이후 조사에서는 ‘현행 유지’ 의견이 17.0%로 증가했다. 이 문제에 대해 충분히 생각할 기회가 있다면 무조건적인 연령 하향이 해결법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시민참여단은 숙의 토론 과정을 통해 촉법소년에 대한 처벌보다 범죄 예방 지원책이 우선돼야 한다는 인식이 가장 높게 상승했다고 한다.

이제 촉법소년 연령 기준 문제에 관한 2차 공론화는 성평등부가 아닌 법무부가 맡기로 했다. 법무부가 주도할 공론화가 어떤 방식일지 알 수 없으나 기준 연령의 전면 하향으로 결론이 나면 ‘권력자의 뜻에 따라 결론을 정해 두고 공론화를 한’ 모양새가 된다. 이럴 거면 앞서 숙의 토론은 왜 했느냐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이번 일은 대통령 주문에 따라 이뤄지는 톱다운 방식의 정책 설계의 한계도 생각하게 한다. 이 대통령이 지시한 탈모의 건강보험 적용 검토는 부정적 여론에 토론회가 취소되는 등 진행이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임신중지 약물을 의사의 재량에 따라 처방하게 하자는 제안도 의료계가 강하게 반대하고 있어 추진이 쉽지 않아 보인다.
권기석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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