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2026.07.31.
신유진 작가·번역가

감정이나 영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습관과 의지 쓰기의 기술이 결합돼야 한다
대학원에 다닐 때 일이다. 바쁜 생활에 쫓겨 논문을 포기하려던 차에 담당 교수님의 조언을 들었다. 데이트하듯 약속을 정하고, 그 시간만큼은 방해받지 않은 채 내가 써야 할 글과 진심으로 만나라는 것이었다. 글쓰기 수업에 찾아오는 학인들도 저마다의 삶으로 분주하다. 쓰고 싶은 열망은 크지만 방법을 모르고 시간도 부족하니, 단번에 글이 써지는 ‘족집게 비법’을 기대하곤 한다. 그럴 때 내가 꺼내는 비장의 카드는 스승에게 배운 방법, 바로 ‘약속하기’다. 정해진 시간에 책상 앞에 앉아 글쓰기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 말이다.
시인 메리 올리버는 ‘시 쓰기 안내서’에서 이 ‘약속’을 로미오와 줄리엣에 빗대어 말한다. 두 사람이 연애할 때 어느 한쪽이 늦거나 바빠서 만남이 어그러졌다면 우리가 아는 로맨스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시를 쓰는 일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에게 시 쓰기란 자기 안의 ‘마음’과 의식적인 ‘기술’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종의 사랑 이야기다. 감정만이 전부일 수 없고, 영감을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으며,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앉는 의지와 쓰기의 기술이 결합되어야 한다는 뜻일 테다.
내게도 글쓰기는 일종의 약속이다. ‘마감’이라는 약속, 독자와의 약속, 그리고 무엇보다 백지와 나 사이에 이루어지는 약속이다. 이 만남은 내게 안전한 말들과 거짓된 감정을 걷어내고 진짜 언어를 찾기를, 백지라는 거울이 비추는 나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기를 요구한다. 글쓰기와 만난 시간 동안 백지가 보여준 나의 맨얼굴은 대체로 초라하다. 무능과 욕심을 그대로 투영하는 글 앞에서 매번 달아나고 싶지만, 이제는 그 충동을 이기는 법을 조금은 안다. 줄리엣의 창문 앞에 서는 로미오가 되어보는 것이다.
로미오의 기다림은 하염없이 서 있는 수동적 자세가 아니라 노래를 부르는 능동적 구애다. 그의 노래는 간절하다. 간절함으로 써 내려간 글에는 기술은 부족할지 몰라도 ‘진심’이 담긴다. 하지만 매번 진심에만 호소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진심을 가볍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니 그것을 증명해 줄 ‘기술’의 연마도 중요할 것이다. 표현의 재료가 될 단어를 수집하고, 사유의 깊이를 더할 공부를 하며, 무엇보다 읽고 또 읽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 스마트폰을 보는 대신 시 한 줄을 읽고, 자기 전 좋은 문장 하나를 품고 잠드는 것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 사랑에 빠진 이들은 늘 연인과의 인사로 하루를 여닫으니까.
글쓰기에 관한 고찰은 어쩔 수 없이 늘 비슷한 이야기를 맴돈다. 우리의 가장 커다란 고민은 결국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 내게 찾아온 이 귀한 열정, ‘쓰고자 하는 욕망’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를 묻는 일이기 때문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어보자. 그들이 자신들의 비극적 결말을 알았더라도 사랑했을까? 내 대답은 ‘예스’다. 그들은 필연적인 순간에 찾아온 열정을 놓치지 않았고, 그 감정을 통해 비로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기 안의 진짜 욕망이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로미오가 줄리엣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평생 철부지 아이로 남지 않았을까. 물론 아무 위험 없이 사는 안전한 삶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응답을 기다리며, 마침내 나를 전부 던져보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삶이 경험이라면, 나는 그저 무탈한 ‘아이’로 살기보다 더 많이 희망하고 더 많이 절망하는 쪽을 택하고 싶다. 그렇게 사랑함으로써 나라는 존재를 완성하고 싶다.
메리 올리버는 시적 감수성이란 ‘감사’, 그리고 ‘자아의 경계를 넘어선 열정과 갈망’이라고 했다. 작가적 감수성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감사, 열정, 그리고 갈망. 한마디로 압축하면 사랑이다. 혹시 지금 이러한 마음을 품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도 이미 사랑에 빠진 것이다. 글쓰기의 창문 앞에서 진심을 담아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로미오가 된 것이다.
신유진 작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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